"아니요, 난…… 마실 수 없소."
"안 마시겠다는 거요, 못 마시겠다는 거요?"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들하고는 안 마실 거요." 리푸틴이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미간을 찌푸렸다.
"신비주의 냄새가 나는군.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사람들이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1분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두지." 그가 갑자기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그 어떤 편견도 우리 중 누구도 각자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가로막을 순 없어."
"스타브로긴은 떠났소?" 키릴로프가 물었다.
"떠났소."
"잘했군."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눈을 번뜩였지만 이내 감정을 억눌렀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소. 각자 자기 약속만 지키면 돼."
"난 약속을 지킬 거요."
"그건 그렇고, 당신이 독립적이고 진보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의무를 완수할 거라고 난 항상 확신했지."
"당신은 정말 우스운 사람이군."
"상관없소. 웃겨줄 수 있다면 기쁜 일이지. 비위를 맞출 수 있다면 언제든 기꺼이 할 거요."
"당신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길 무척이나 바라고 있군. 혹시라도 안 그럴까 봐 겁나는 거요?"
"아니, 잘 들어봐. 당신이 스스로 당신의 계획을 우리의 행동과 연결했잖소. 당신의 계획만 믿고 우리가 이미 몇 가지 일을 저질렀는데, 이제 와서 당신이 거절하면 우리는 곤경에 빠지게 된단 말이오."
"그런 권리는 없소."
"알겠소, 알겠어. 당신 뜻대로 하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 다만 당신의 그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만 하면 되오."
"그럼 당신들이 저지른 그 모든 더러운 짓을 내가 다 떠안아야 한다는 거요?"
"키릴로프, 이보쇼. 겁먹은 거 아니오? 만약 그만두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말하시오."
"난 겁먹지 않았소."
"질문을 너무 많이 하길래 물어본 거요."
"곧 나갈 거요?"
"또 묻는 거요?"
키릴로프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자, 보시오."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점점 더 화가 나고 초조해진 탓에 어조를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당신은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혼자 있고 싶어 나가라고 하지만, 그건 당신 자신에게, 무엇보다 당신에게 아주 위험한 징조요. 생각이 너무 많군. 내 생각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 게 나을 텐데. 정말이지 당신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구려."
"내가 유일하게 괴로운 건, 그 순간 내 곁에 당신 같은 파렴치한이 있다는 거요."
"뭐, 그건 상관없소. 그럼 그때 나는 나가서 현관에 서 있겠소. 당신이 죽어가면서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쓴다면…… 그건 아주 위험하니까. 내가 현관으로 나갈 테니,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당신보다 훨씬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시오."
"아니, 훨씬 못하진 않소. 재능은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저급한 인간이라 아주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
"기쁘군, 정말 기쁘오. 방금 말했듯이 그런 순간에 당신에게 재미를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그러니까 내 말은…… 어쨌든 당신 말을 존중하며 듣고 있다는 거요."
"당신은 아무것도 못 해. 심지어 지금도 감추는 게 이득인데 얄팍한 악의조차 숨기질 못하는군. 나를 화나게 하면 갑자기 반년은 더 살고 싶어질지도 모르오."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시계를 보았다.
"난 당신 이론을 단 한 번도 이해한 적 없소. 하지만 당신이 우리를 위해 그걸 지어낸 게 아니라는 건 알지. 그러니 우리 없이도 해낼 거요. 당신이 그 이념을 삼킨 게 아니라 그 이념이 당신을 삼켰다는 것도 알기에, 당신은 그만두지도 못할 테고."
"뭐라고? 이념이 나를 삼켰다고?"
"그렇소."
"내가 이념을 삼킨 게 아니라고? 그거 좋군. 당신은 머리가 좀 모자라. 그저 나를 도발할 뿐이지만, 나는 자랑스러워."
"아주 훌륭하오, 아주 좋아. 바로 그거요. 당신이 자랑스러워해야지."
"됐소. 술도 다 마셨으니 그만 나가시오."
"젠장, 어쩔 수 없군."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일러. 키릴로프, 이보쇼. 먀스니치하네 집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소? 아니면 그 여자도 거짓말을 한 거요?"
"못 만날 거요. 그 사람은 여기 있으니까."
"여기 있다고? 젠장, 대체 어디에?"
"부엌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있소."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말도 안 돼! 여권도 돈도 없는 놈이!"
"모르겠소. 그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더군. 옷도 다 입고 준비를 마쳤어.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거요. 당신을 비열한 놈이라고 하더군. 당신이 주는 돈 따위는 기다리고 싶지 않다면서."
"아! 그놈은 내가…… 아니, 사실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데…… 그놈이 어디 있지, 부엌에 있나?"
키릴로프가 좁고 어두운 방으로 통하는 옆문을 열었다. 그 방에서 계단 세 개를 내려가면 부엌이 나왔는데, 부엌에는 평소 요리사가 잠을 자는 칸막이방이 있었다. 그 칸막이방 구석, 성상 아래에는 지금 페디카가 널빤지로 만든, 덮개 없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보드카 반 슈토프와 접시에 담긴 빵, 그리고 질그릇에 담긴 감자를 곁들인 차가운 쇠고기 한 점이 놓여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고 이미 반쯤 취해 있었지만, 외투를 걸친 채 떠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칸막이 너머에서는 사모바르가 끓고 있었는데, 페디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실은 페디카가 일주일 넘게 매일 밤 '알렉세이 닐리치께서 밤마다 차를 드시는 걸 몹시 좋아하셔서' 직접 불을 지피고 준비해둔 것이었다. 나는 요리사가 없으니 저 감자를 곁들인 쇠고기도 키릴로프가 아침부터 직접 페디카를 위해 구워주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표트르 스테파노비치가 굴러떨어지듯 내려오며 물었다. "왜 시키는 대로 기다리지 않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