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의견을 형성하고 이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워야만 하는 근거들이 이와 같고, 그러한 자유가 허용되거나 금지되더라도 굴하지 않고 주장되지 않을 경우 인간의 지적 본성, 나아가 도덕적 본성에 미칠 해로운 결과들이 이와 같다면, 이제 우리는 같은 이유로 인간이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는 것, 즉 그 행동이 전적으로 자신의 위험과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한 타인으로부터 물리적 또는 도덕적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 또한 자유로워야 하는지 검토해 보자. 이 마지막 단서는 물론 필수적이다. 그 누구도 행동이 의견만큼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견이 표현되는 상황이 그 표현으로 인해 어떤 유해한 행위를 직접적으로 선동하게 되는 경우에는 의견조차 그 면책권을 잃는다. 곡물상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한다거나 사유 재산은 도둑질이라는 의견은 단순히 언론을 통해 유포될 때는 방해받지 않아야 하지만, 곡물상 집 앞에 모인 흥분한 군중에게 구두로 전달되거나 같은 군중 사이에 벽보 형태로 배포될 때는 정당하게 처벌받을 수 있다.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종류의 행동은, 인류의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인류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통제될 수 있으며, 더 중요한 사례들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통제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는 이만큼 제한되어야 하며,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타인과 관련된 일에서 타인을 방해하지 않고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 자신의 성향과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면, 의견이 자유로워야 함을 보여주는 같은 이유들이 그가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의 의견을 실천하는 것 또한 방해받지 않고 허용되어야 함을 증명한다. 인류는 오류가 없지 않다는 사실, 인류의 진리란 대부분 반쪽짜리 진리에 불과하다는 사실, 의견의 일치는 반대 의견들을 가장 충분하고 자유롭게 비교한 결과가 아닌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인류가 현재보다 진리의 모든 측면을 훨씬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다양성이 악이 아니라 선이라는 사실은, 의견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 방식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다.인류가 불완전한 동안에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삶의 실험이 존재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성격의 다양성에 자유로운 영역이 주어져야 하며, 누군가가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여러 삶의 방식이 가진 가치가 실천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요컨대, 일차적으로 타인과 관련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개별성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타인의 전통이나 관습이 행동의 규칙이 되는 곳에서는 인간 행복의 주요 요소 중 하나가, 아니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진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을 유지하는 데 있어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인정된 목적을 향한 수단을 평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무관심에 있다. 만약 개별성의 자유로운 발전이 복지의 핵심 요소 중 하나라는 점, 그리고 그것이 문명, 교양, 교육, 문화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모든 것과 대등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의 필수적인 부분이자 조건이라는 점을 절감한다면, 자유가 저평가될 위험은 없을 것이며 자유와 사회적 통제 사이의 경계를 조정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의 자발성이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혹은 그 자체로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일반적인 사고방식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재 인류의 방식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인류를 지금과 같이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왜 그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좋지 않은지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자발성은 대다수의 도덕 및 사회 개혁가들의 이상에 포함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 개혁가들이 자신의 판단으로 인류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대중이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되고 어쩌면 반항적이기까지 한 장애물로 여겨져 질투의 시선을 받는다.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명망 높은 빌헬름 폰 훔볼트가 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교리의 의미를 독일 밖에서는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다. 즉 '인간의 목적, 다시 말해 모호하고 일시적인 욕망이 아니라 이성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명령에 의해 처방된 것은, 인간의 능력을 하나의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로 가장 높고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교리 말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특히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자들이 항상 주목해야 할' 대상은 바로 '힘과 발전의 개별성'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유와 다양한 상황'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고, 이들이 결합하여 '개별적 활력과 다면적인 다양성'이 생겨나며 이것들이 결합하여 '독창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폰 훔볼트의 교리와 같은 주장에 익숙하지 않고, 개별성에 그토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놀랄지도 모르지만, 이 문제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행동의 탁월함에 대한 어떤 사람의 생각도 사람들이 서로를 모방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자신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자신의 판단이나 개별적인 성격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마치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던 것처럼, 혹은 경험이 지금까지 한 가지 존재 방식이나 행동 방식이 다른 방식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인간 경험의 확립된 결과를 알고 그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젊은 시절에 교육받고 훈련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성숙해진 인간이 경험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자 마땅한 조건이다. 기록된 경험 중 어느 부분이 자신의 상황과 성격에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타인의 전통과 관습은 어느 정도 그들의 경험이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에 대한 증거이며, 추정적 증거로서 그들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첫째, 그들의 경험이 너무 편협했을 수도 있고, 그들이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둘째, 그들의 경험 해석이 옳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관습은 관습적인 상황과 관습적인 성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자신의 상황이나 성격은 비관습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관습이 관습으로서 좋고 자신에게 적합하다 하더라도, 단지 관습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습에 순응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자질을 교육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한다.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적 활동, 그리고 도덕적 선호와 같은 인간의 능력은 선택을 할 때에만 발휘된다. 관습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 최선인지 식별하거나 열망하는 연습을 전혀 하지 못한다. 정신적, 도덕적 능력은 근육의 힘과 마찬가지로 사용함으로써만 향상된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행동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을 믿는 것으로는 어떠한 능력도 발휘되지 않는다.어떤 의견의 근거가 그 사람 자신의 이성에 비추어 설득력이 없다면, 그가 그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이성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동기가 그 자신의 감정이나 성격과 부합하지 않는다면(애정이나 타인의 권리가 관련되지 않은 경우), 그것은 결국 그의 감정과 성격을 능동적이고 활기차게 만드는 대신 무기력하고 둔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세상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자신의 삶의 계획을 맡기는 사람은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능력 외에 다른 어떤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삶의 계획을 선택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관찰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추론과 판단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며, 결정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식별력을 발휘해 결단을 내리며,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 신중한 결정을 고수할 수 있는 확고함과 자기 통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행동의 영역이 클수록 이러한 자질들을 더욱 필요로 하고 또 발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능력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어떤 올바른 길로 인도받거나 해로운 일을 피하며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서는 인간으로서 그만한 가치를 지닐 수 있겠는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인격을 지녔느냐 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인간의 삶이 마땅히 완벽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인간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 인간 그 자신이다. 가령 집을 짓고, 곡물을 재배하고, 전쟁을 치르고, 소송을 다루고, 심지어 교회를 세우고 기도를 올리는 일까지 모두 기계, 즉 인간의 형상을 한 자동 인형들이 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세상의 문명화된 지역에 살고 있는, 비록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만들어낼 것의 보잘것없는 표본에 불과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을 자동 인형으로 대체하는 것은 엄청난 손실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모델에 따라 만들어져 정해진 일만을 수행하도록 설정된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를 만드는 내적인 힘의 경향에 따라 모든 방향으로 스스로 성장하고 발달해야 하는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 그리고 관습을 지적으로 따르거나 심지어 때때로 지적으로 관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습에 맹목적이고 기계적으로 집착하는 것보다 낫다는 점은 아마도 인정될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이해력이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인정되지만, 우리의 욕망과 충동 역시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거나, 우리 자신의 충동을 강하게 소유하는 것이 위험이자 덫일 뿐이라고 인정하려는 의지는 부족하다. 그러나 욕망과 충동은 신념이나 제약만큼이나 완전한 인간의 일부이다. 강한 충동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즉 한 가지 목표와 성향이 강하게 발전하는 동안 그와 공존해야 할 다른 목표와 성향이 약하고 불활성 상태로 남아 있을 때만 위험하다. 사람들이 나쁘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강한 충동과 약한 양심 사이에는 자연적인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어떤 사람의 욕망과 감정이 다른 사람보다 강하고 다양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가 인간 본성의 원재료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아마도 더 큰 악을 행할 수도 있지만 분명 더 큰 선을 행할 수도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강한 충동은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에너지는 나쁜 용도로 쓰일 수도 있지만, 게으르고 무감각한 천성보다는 활기찬 천성에서 항상 더 많은 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가장 자연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도야된 감정이 가장 강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인 충동을 생생하고 강력하게 만드는 동일한 강한 감수성은 또한 가장 열정적인 미덕에 대한 사랑과 가장 엄격한 자기 통제가 생성되는 원천이기도 하다. 사회가 영웅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영웅을 만들 재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자질들을 도야함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이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문화에 의해 발전하고 수정된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는 사람을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자신의 욕망과 충동이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은 증기 기관이 성격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성격이 없다. 만약 자신의 것이라는 점에 더해 충동이 강하고 강한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는 활기찬 성격을 가진 것이다.욕망과 충동의 개별성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장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가 강인한 본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성격이 뚜렷한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도 없고,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에너지가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야만 할 것이다.
사회 초기의 어떤 단계에서는 이러한 힘들이 당시 사회가 가졌던 규율과 통제력을 훨씬 앞질렀을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자발성과 개별성이라는 요소가 과도하여 사회적 원리가 그것과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의 어려움은 신체나 정신이 강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규칙에 복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법과 규율은 마치 황제들과 투쟁하던 교황들처럼 인간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주장했고, 사회가 그것을 묶어둘 다른 적절한 수단을 찾지 못했기에 인간의 성격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삶 전체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 사회는 개별성을 확실히 제압했으며, 오늘날 인간의 본성을 위협하는 것은 개인적인 충동과 기호의 과잉이 아니라 부족이다. 지위나 개인적 재능 덕분에 강했던 자들의 열정이 법과 규율에 습관적으로 반항하여, 그들의 영향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안전을 누릴 수 있게 하려면 그들을 엄격하게 묶어둘 필요가 있었던 시절과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현대에는 사회 최상층부터 최하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적대적이고 두려운 검열의 눈초리 아래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개인이나 가족은 타인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의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을 선호하는가? 나의 성격과 기질에 무엇이 어울리는가? 내 안의 가장 좋고 높은 면이 마음껏 발휘되어 성장하고 번영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대신 '내 지위에 어울리는 것은 무엇인가? 나와 같은 지위와 재정적 형편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하는가?' 혹은 더 나아가 '나보다 더 높은 지위와 형편의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하는가?'라고 자문할 뿐이다. 내가 그들이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보다 관습적인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관습적인 것 외에는 어떤 성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이처럼 정신 그 자체가 멍에 아래로 굴복하고 만다. 사람들이 즐거움을 위해 하는 일에서조차 순응이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이다. 그들은 군중 속에 섞여 살아가며, 흔히 행해지는 것들 중에서만 선택을 한다. 취향의 독특함이나 행동의 괴짜 같은 면모는 범죄와 마찬가지로 기피 대상이 된다. 결국 자신의 본성을 따르지 않게 됨에 따라 그들은 따라야 할 본성조차 잃어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역량은 시들어 고갈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강렬한 소망이나 타고난 즐거움을 누릴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대체로 자생적인 혹은 온전히 자신만의 의견이나 감정을 갖지 못하게 된다. 자, 이것이 인간 본성의 바람직한 상태인가, 아닌가?
칼뱅주의 이론에 따르면 그렇다. 그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유일하고 큰 죄는 자기 의지다. 인류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은 복종에 포함된다.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따라서 너는 이렇게 해야 하며, 다른 식으로는 할 수 없다. 즉 "의무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 죄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에, 인간 본성이 그 안에서 죽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다. 이러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간의 능력이나 역량, 감수성 중 어느 하나를 짓밟는 것도 악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신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 외에 어떤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만약 그가 신의 뜻을 더 효과적으로 행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차라리 그 능력이 없는 편이 낫다. 이것이 칼뱅주의 이론이며, 자신들을 칼뱅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이를 완화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완화된 형태란 신의 뜻이라고 주장되는 것에 대해 덜 금욕적인 해석을 내리는 것인데, 인류가 그들의 성향 중 일부를 충족시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라 복종의 방식, 즉 권위에 의해 그들에게 규정된 방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사태의 필연적인 조건에 의해, 그것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오늘날 이와 같은 교묘한 형태로, 이러한 편협한 인생관과 그것이 옹호하는 위축되고 틀에 박힌 인간상에 대한 강한 경향이 존재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이들이 인간이 이렇게 억눌리고 왜소해진 모습이야말로 신이 설계한 그대로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마치 나무를 가지치기해 자르거나 동물의 모양으로 깎아 놓는 것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이 선한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것이 종교의 일부라면, 그러한 믿음과 더 일관된 생각은 신이 모든 인간의 능력을 주신 것이 그것을 뿌리 뽑고 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야하고 펼쳐 보이게 하기 위함이며, 신은 그 피조물들이 자신 안에 구현된 이상적인 개념에 더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즉 이해력, 행동력, 또는 향유 능력이 조금이라도 증진될 때마다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칼뱅주의와는 다른 인간적 탁월함의 유형이 존재하는데, 이는 인류의 본성이 단지 부정되기 위한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부여받았다는 개념이다. "이교도적인 자기주장"은 "기독교적인 자기부정"과 마찬가지로 인간 가치의 요소 중 하나이다. 자기 발전에 대한 그리스적 이상이 있는데, 이는 플라톤적이고 기독교적인 자기 통제의 이상과 융합되기는 하나 그것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알키비아데스보다는 존 녹스가 되는 편이 나을지 모르나, 그 둘보다는 페리클레스가 되는 편이 더 낫다. 오늘날 우리에게 페리클레스 같은 인물이 있다면 그 역시 존 녹스에게 있던 좋은 면모를 하나도 갖추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타인의 권리와 이익이 부과하는 한계 내에서 자신만의 개별성을 획일화하여 마모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도야하고 끌어냄으로써 고귀하고 아름다운 관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또한 행위는 그것을 행하는 자의 인격을 닮아가기 마련이므로, 같은 과정에 의해 인간의 삶 또한 풍요롭고 다채로우며 생동감 넘치게 된다. 이는 고상한 사유와 고양된 감정에 더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인류를 속해 있을 가치가 훨씬 더 큰 존재로 만듦으로써 모든 개인을 인류와 결속하는 끈을 강화한다. 개별성이 발달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각자는 자신에게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따라서 타인에게도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더 큰 삶의 충만함이 깃들게 되고, 개개의 구성원에게 삶이 더 풍성해질 때 그들로 구성된 전체 집단 또한 그러해진다. 인간 본성의 강인한 표본들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압박은 불가피하지만, 이조차도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한 보상이 따른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성향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됨으로써 개인이 잃게 되는 발달의 수단은, 주로 타인의 발달이라는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다. 설령 개인 자신에게도 이기적인 부분에 가해진 제약으로 인해 가능해진 사회적 본성의 더 나은 발달이라는 충분한 보상이 존재한다. 타인을 위해 엄격한 정의의 규칙을 지키는 것은 타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감정과 능력을 발달시킨다. 그러나 타인의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에서 그들의 단순한 불쾌감 때문에 제약을 받는 것은, 그 제약에 저항하며 드러날 수 있는 성격의 힘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가치 있는 것도 발달시키지 못한다. 만약 이에 순응한다면, 그것은 본성 전체를 무디고 둔하게 만들 뿐이다. 각자의 본성이 자유롭게 발휘되려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어떤 시대에 이러한 자유가 행사된 정도에 비례하여, 그 시대는 후세에 주목할 만한 시대가 되었다. 개별성이 존재하는 한 독재조차 최악의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또한 무엇이라 불리든, 그것이 신의 뜻을 강제하는 것이든 인간의 명령을 강제하는 것이든, 개별성을 짓밟는 것은 무엇이나 독재이다.
개별성이 곧 발전과 같은 것이며, 개별성을 도야하는 것만이 충분히 발달한 인간을 만들어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으므로, 나는 여기서 논의를 마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사에서 어떤 조건이 인간을 그들이 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더 가깝게 만든다는 것보다 더 낫거나 더 좋은 평가가 어디 있겠는가? 혹은 선에 대한 어떤 방해물이 이것을 막는다는 것보다 더 나쁜 평가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고려 사항들만으로는 가장 설득이 필요한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발달한 인간들이 발달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어떤 유용성이 있다는 점을 추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즉, 자유를 원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를 활용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자유를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어떤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로, 나는 그들이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제안하고 싶다. 독창성이 인간사의 귀중한 요소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한때 진리였던 것이 더 이상 진리가 아님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습을 시작하고 더 깨어 있는 행동과 더 나은 취향과 감각을 삶의 본보기로 제시할 사람이 항상 필요하다. 세상이 이미 모든 방식과 관습에서 완벽함에 도달했다고 믿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이를 쉽게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다 이런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전체 인류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실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채택되었을 때 기존 관습보다 나은 개선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하지만 이 극소수의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소금이며, 그들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고인 물처럼 썩고 말 것이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좋은 것들을 도입할 뿐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들이기도 하다. 새로이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면, 인간의 지성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될까? 또한 기존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이유를 잊고 인간이 아닌 가축처럼 그 일을 하게 되는 이유가 될까? 가장 좋은 신념과 관습조차 기계적인 것으로 전락하려는 경향이 너무나 크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독창성을 통해 그러한 신념과 관습의 근거가 단순히 전통적인 것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사람들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죽은 것들은 살아있는 작은 충격조차 견디지 못할 것이며, 비잔티움 제국처럼 문명이 쇠퇴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천재적인 인물들이 소수라는 것은 사실이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그들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랄 토양을 보존해야 한다. 천재는 자유의 '분위기'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다. 천재적인 사람들은 '말의 정의상'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 개별적이며, 그 결과 사회가 구성원들의 인격 형성이라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제공하는 소수의 틀 속에 해로운 압박 없이 스스로를 맞추기가 어렵다. 만약 그들이 소심함 때문에 이러한 틀 중 하나에 억지로 끼워 맞춰지고, 압박 속에서 팽창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다면, 사회는 그들의 천재성으로부터 거의 어떤 혜택도 얻지 못할 것이다.만약 그들이 강인한 성격을 지녀 그 족쇄를 부수어 버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평범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데 실패한 사회의 표적이 되어, '야만적', '괴팍함'과 같은 비난을 받으며 엄중한 경고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이는 마치 나이아가라 강이 네덜란드의 운하처럼 강둑 사이를 매끄럽게 흐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천재성의 중요성과 그것이 사고와 실천 양면에서 자유롭게 펼쳐지도록 허용해야 할 필요성을 이처럼 강조한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도 이 입장을 부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실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에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점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재성이 누군가에게 흥미진진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해준다면 그것을 훌륭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고와 행동에서의 독창성이라는 천재성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는, 그것을 감탄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도 속으로는 거의 모두가 그것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놀라울 것도 없다. 독창성은 독창적이지 못한 마음이 그 유용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들은 독창성이 자신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줄지 그들이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독창성이 아닐 것이다. 독창성이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첫 번째 서비스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인데, 일단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그들 자신도 독창적이 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누군가가 처음으로 행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이 독창성의 결실임을 기억하면서, 독창성이 여전히 성취해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고 믿을 만큼 겸손해지도록 하자. 그리고 독창성의 필요성을 덜 느낄수록 사실은 그것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스스로 확신해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진정한 혹은 가상의 정신적 탁월함에 대해 어떤 경의가 표해지거나 실제로 지불된다 하더라도, 전 세계적인 사태의 일반적 경향은 평범함을 인류 가운데 우세한 권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대 역사에서, 중세 시대에, 그리고 봉건제에서 현재에 이르는 긴 과도기를 거치며 점차 그 정도는 줄어들었지만, 개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이었으며, 만약 그가 위대한 재능이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현재 개인들은 군중 속에 묻혀 있다. 정치에 있어서 오늘날 여론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진부한 사실이다. 이름을 붙일 만한 유일한 권력은 대중의 권력이며, 대중의 경향과 본능을 대변하는 기관이 된 정부의 권력이다. 이는 공적인 거래뿐만 아니라 사적인 삶의 도덕적, 사회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같은 종류의 대중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그들이 백인 전체 인구이고, 영국에서는 주로 중산층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대중, 즉 집단적인 평범함이다. 더욱 새로운 사실은, 대중이 이제는 교회나 국가의 고위 인사, 표면적인 지도자, 혹은 책으로부터 의견을 얻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사고는 그들 자신과 매우 닮은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 즉흥적으로 그들에게 말하거나 그들의 이름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대신 이루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현재 인류 정신의 낮은 상태에서 더 나은 것이 일반적인 규칙으로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함에 의한 정부가 평범한 정부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민주주의나 다수의 귀족에 의한 어떠한 정부도, 그 정치적 행위나 그것이 조장하는 의견, 자질, 정신적 태도에 있어서, 주권자인 다수가 더 고도로 재능 있고 교육받은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조언과 영향력에 의해 인도받도록 내버려 둔 경우(그들의 전성기에는 항상 그렇게 해왔다)를 제외하고는 결코 평범함을 넘어설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지혜롭거나 고귀한 일의 시작은 개인에게서 오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어떤 한 개인에게서 시작된다. 평범한 사람의 명예와 영광은 그가 그러한 주도를 따를 능력이 있다는 점, 즉 그가 내면적으로 지혜롭고 고귀한 것에 반응할 수 있고 눈을 뜨고 그것으로 인도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영웅 숭배'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천재적인 강자가 세계의 정부를 강제로 장악하고 그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하는 것을 박수 치며 지지하는 것 말이다.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길을 제시할 자유뿐이다. 타인을 강제로 그 길로 끌어들이는 권력은 다른 모든 이들의 자유와 발전과 어긋날 뿐만 아니라, 강자 자신을 타락시킨다. 그러나 단지 평범한 사람들의 대중적 의견이 어디서나 지배적인 권력이 되었거나 되어가고 있을 때, 그 경향에 대한 균형추이자 교정책은 생각의 더 높은 고지에 서 있는 사람들의 더욱 뚜렷해진 개별성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야말로 예외적인 개인들은 좌절하기보다 오히려 대중과 다르게 행동하도록 장려되어야 한다. 다른 시대에는 그들이 단순히 다르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더 나은 행동을 해야만 어떤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관습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 관습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공헌이다. 여론의 횡포가 괴짜 같은 행동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횡포를 깨뜨리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괴짜가 될 필요가 있다. 괴짜 같은 행동은 성격의 강인함이 풍부한 곳에서 항상 넘쳐났으며, 사회 내의 괴짜 같은 행동의 양은 일반적으로 그 사회가 지닌 천재성, 정신적 활력, 도덕적 용기의 양에 비례해 왔다. 오늘날 괴짜가 되기를 감히 시도하는 사람이 이토록 적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을 보여준다.
나는 관습적이지 않은 것들에 가능한 한 자유로운 영역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중 어떤 것이 관습으로 전환되기에 적합한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의 독립성과 관습에 대한 무시는 더 나은 행동 방식이나 일반적인 채택에 더 가치 있는 관습이 발견될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이유만으로 장려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는 정신적으로 확실히 우월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의 존재가 단 하나의, 혹은 소수의 틀에 맞춰져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용인될 만한 상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존재를 설계하는 그 사람만의 방식이 최고인데, 그것이 본질적으로 최고여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양과 같지 않으며, 양조차도 똑같이 구분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니다. 사람의 치수에 맞게 만들어지거나 창고에 가득 쌓인 것 중에서 고르지 않으면 몸에 딱 맞는 옷이나 부츠를 구할 수 없는데, 인생을 옷보다 맞추기 쉽다거나 인간이 발 모양보다 전체적인 신체적, 영적 구조 면에서 서로 더 비슷하기라도 한가? 사람들이 취향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 모두를 하나의 모델에 따라 형성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게다가 서로 다른 사람들은 영적 발전을 위해 서로 다른 조건을 필요로 하며, 다양한 식물들이 하나의 물리적 대기와 기후 속에서 건강하게 살 수 없듯이, 그들 또한 같은 도덕적 환경 속에서 건강하게 존재할 수 없다. 한 사람에게는 더 높은 본성을 도야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방해가 된다. 같은 삶의 방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행동과 향유의 모든 능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 주는 건강한 자극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내면의 삶을 정지시키거나 짓눌러 버리는 정신없는 짐이 되기도 한다. 즐거움의 원천, 고통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서로 다른 물리적, 도덕적 작용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어 사람들 간에는 이와 같은 차이가 존재하므로, 그들의 삶의 방식에도 상응하는 다양성이 없다면 그들은 행복의 정당한 몫을 얻지도 못할 것이며, 자신의 본성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적, 도덕적, 미적 수준까지 성장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정서와 관련된 관용은 왜 그 추종자가 다수라는 이유로 묵인을 강요하는 취향과 삶의 방식에만 적용되어야 하는가?(일부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취향의 다양성이 완전히 인정되지 않는 곳은 없다. 조정, 흡연, 음악, 운동, 체스, 카드 게임, 공부 등을 좋아하거나 싫어해도 비난받지 않는데, 이는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 모두가 너무 많아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거나 "모든 사람이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남성, 그리고 특히 여성은 마치 그들이 어떤 심각한 도덕적 비행을 저지른 것처럼 많은 비하적인 언급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평판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치를 다소라도 누리려면 작위나 그 밖의 계급장, 혹은 고위층 사람들의 배려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지만, 다소라도 누리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그런 방종을 지나치게 허용하는 사람은 비난을 넘어선 더 나쁜 위험, 즉 정신이상 심판 위원회에 회부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친족들에게 넘어갈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론의 흐름에는 개별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드는 독특한 특성이 하나 있다. 인류의 일반적인 평균치는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성향에 있어서도 온건하다. 그들에게는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도록 이끌 만큼 강렬한 취향이나 소망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런 취향과 소망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 모두를 평소 경멸해 마지않던 제멋대로이고 무절제한 부류와 동일시한다. 이제 이러한 일반적인 사실에 더해, 도덕 개선을 향한 강력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가정하기만 하면 우리가 무엇을 예상해야 할지는 자명해진다. 오늘날 바로 그러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행동의 규칙성을 높이고 과잉을 억제하는 방식에서 실제로 많은 성과가 있었으며, 널리 퍼진 박애 정신은 동료 인간들의 도덕적, 실천적 개선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활동 분야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은 대중으로 하여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일반적인 행동 규칙을 규정하고 모든 이를 승인된 기준에 순응시키려 노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그 기준은 '아무것도 강렬하게 열망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 기준이 제시하는 인격의 이상향은 뚜렷한 개성이 없는 것이다. 마치 중국 여성의 발처럼, 인간 본성 중 튀어나와서 그 사람의 외양을 평범한 인류와 두드러지게 다르게 만드는 모든 부분을 압박을 통해 짓이겨 없애는 것이 그 이상이다.
바람직한 것의 절반을 배제하는 이상이 흔히 그렇듯이, 현재의 승인 기준은 나머지 절반의 열등한 모방만을 생산할 뿐이다. 활기찬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위대한 에너지와 양심적인 의지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되는 강한 감정 대신, 그 결과는 미약한 감정과 미약한 에너지일 뿐이며, 따라서 의지나 이성의 힘 없이도 외적으로 규칙에 순응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미 거대한 규모의 정력적인 인물들은 단지 전통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사업 외에 에너지를 발산할 출구는 거의 없다. 거기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여전히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업무에서 남은 약간의 에너지는 어떤 취미 활동에 소모되는데, 이는 유용하거나 심지어 박애적인 취미일 수는 있지만, 항상 어느 한 가지에 국한되며 대개는 작은 규모의 일일 뿐이다. 영국의 위대함은 이제 모두 집단적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작아졌고, 단지 결합하는 습관에 의해서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의 도덕적, 종교적 박애주의자들은 이 상태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와는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지금의 영국을 만들었으며, 영국의 쇠퇴를 막기 위해서도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필요할 것이다.
관습의 전제 정치는 어디에서나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상존하는 장애물이며, 상황에 따라 자유의 정신, 혹은 진보나 개선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관습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지향하려는 성향과 끊임없이 대립한다. 개선의 정신이 항상 자유의 정신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개선을 강요하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정신은 그러한 시도에 저항하는 한, 국지적이고 일시적으로는 개선의 반대자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선의 유일하고 변함없으며 영구적인 원천은 자유이다. 왜냐하면 자유가 있다면 개인의 수만큼이나 많은 독립적인 개선의 중심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사랑이든 개선에 대한 사랑이든, 두 가지 형태의 진보적 원리는 모두 관습의 지배와 대립하며, 적어도 관습이라는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투쟁은 인류 역사의 주된 관심사이다. 엄밀히 말해 세계의 대부분은 역사가 없다. 관습의 전제 정치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동양 전체가 그러하다. 그곳에서 관습은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호소이며, 정의와 권리는 관습에의 순응을 의미한다. 권력에 취한 폭군이 아닌 이상, 누구도 관습이라는 논리에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있다. 그 나라들도 한때는 독창성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인구가 많고 학식이 높으며 삶의 여러 기술에 정통한 상태로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냈고,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웅장한 궁전과 화려한 사원을 가졌을 때 숲을 떠돌던 부족들의 신하나 종속국이 되었지만, 그 부족들 위에서는 관습이 자유와 진보와 함께 나뉜 지배력만을 행사했다. 한 민족은 일정 기간 진보하다가 멈추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멈추는가? 바로 개별성을 잃어버릴 때이다. 유럽의 국가들에 이와 유사한 변화가 닥친다면 그것은 정확히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다. 이 국가들을 위협하는 관습의 전제 정치는 정확히 정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독특함을 금지하지만, 모두가 함께 변화하기만 한다면 변화 자체를 막지는 않는다. 우리는 조상들의 고정된 의복을 버렸지만, 여전히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 다만 유행은 일 년에 한두 번 바뀔 뿐이다.우리는 변화가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움이나 편리함에 대한 어떤 관념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화를 위해 이루어지도록 신경 쓴다. 왜냐하면 동일한 아름다움이나 편리함에 대한 관념이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르고 또 다른 순간에 모든 사람에 의해 동시에 버려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진보적이기도 해서, 기계적인 분야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발명을 해내고 그것이 더 나은 것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유지한다. 우리는 정치, 교육, 심지어 도덕에 있어서도 개선을 열망하지만, 이 마지막 분야에서 개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주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만큼 훌륭하게 만들도록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를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진보적인 민족이라고 자부한다. 우리가 맞서 싸우는 것은 바로 개별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두 똑같이 만들었다면 경이로운 일을 해냈다고 생각할 테지만,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차이점이 대개 자신의 유형이 가진 불완전함과 타인의 우월함을 주의하게 하거나, 둘의 장점을 결합하여 그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첫 번째 요인이라는 사실은 잊고 있다. 우리에게는 중국이라는 경고의 사례가 있다. 중국은 매우 재능 있고, 어떤 면에서는 지혜롭기까지 한 민족으로, 초기에 특히 훌륭한 관습들을 갖추게 된 드문 행운을 누렸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가장 깨어 있는 유럽인조차도 일정한 한계 내에서 현자나 철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해야 할 인물들의 업적이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지혜를 공동체의 모든 이의 정신에 가능한 한 깊이 각인시키고, 그것을 가장 많이 습득한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보장하는 탁월한 장치를 갖춘 것으로도 유명하다. 분명 이렇게 한 사람들은 인간 진보의 비밀을 발견했으며, 세계의 움직임 속에서 꾸준히 선두를 유지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은 정체되어 수천 년 동안 그대로 머물러 왔으며, 만약 그들이 더 발전하게 된다면 그것은 외국인들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들은 영국의 박애주의자들이 그토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는 것, 즉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고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동일한 격언과 규칙으로 다스리게 하는 일에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열매이다.현대 여론 체제는 조직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할 뿐, 중국의 교육 및 정치 체제가 조직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개별성이 이러한 멍에에 맞서 성공적으로 스스로를 주장할 수 없다면, 유럽은 고귀한 전례와 기독교 신앙을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중국이 되는 길로 치닫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유럽을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보호해 온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유럽 국가들을 인류의 정체된 부분이 아니라 진보하는 부분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우월한 탁월함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 탁월함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존재할 뿐이다. 오히려 그 이유를 꼽자면 성격과 문화의 놀라운 다양성 때문이다. 개인, 계층, 국가는 서로 극도로 달랐으며, 각각 가치 있는 무언가로 이어지는 매우 다양한 경로를 개척해 왔다. 비록 모든 시대마다 서로 다른 경로를 걷는 이들이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고, 나머지 모두가 자신의 길을 걷도록 강요할 수 있다면 그것이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서로의 발전을 방해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영구적인 성공을 거둔 적이 거의 없으며, 결국 각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타인들이 제공한 좋은 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판단에 유럽은 이러한 여러 갈래의 경로 덕분에 진보적이고 다각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이러한 혜택을 상당히 적게 누리기 시작했다. 유럽은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만들려는 중국적 이상을 향해 확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토크빌은 그의 마지막 중요한 저서에서 오늘날의 프랑스인들이 지난 세대의 프랑스인들보다 얼마나 더 서로를 닮아 있는지 지적한다. 영국인들에 대해서도 훨씬 더 큰 정도로 같은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빌헬름 폰 훔볼트의 글에서 이미 인용했듯이, 그는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 발달의 필수 조건으로 자유와 상황의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를 지적했다. 이 두 가지 조건 중 두 번째 조건은 이 나라에서 날마다 줄어들고 있다. 서로 다른 계층과 개인을 둘러싸고 그들의 성격을 형성하는 환경은 매일 더 동질화되고 있다. 이전에는 서로 다른 지위, 서로 다른 이웃, 서로 다른 직업과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소위 서로 다른 세계에 살았지만, 현재는 거의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이제 그들은 같은 것을 읽고, 같은 것을 듣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장소에 가며, 희망과 두려움이 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고, 같은 권리와 자유를 가지며, 그것을 주장할 같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지위의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사라져 버린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질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시대의 모든 정치적 변화는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추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를 촉진하고 있다.교육의 모든 확대는 이를 촉진하는데, 교육은 사람들을 공통적인 영향력 아래에 두어 사실과 감정의 일반적인 원천에 접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통신 수단의 개선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주민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하게 하고 거주지 이동의 흐름을 빠르게 유지함으로써 이를 촉진한다. 상업과 제조업의 증가는 안락한 생활의 이점을 더 널리 확산시키고 심지어 가장 높은 수준의 야망까지도 일반적인 경쟁에 개방함으로써 이를 촉진하는데, 이로써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은 더 이상 특정 계층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특징이 된다. 인류 사이에 전반적인 유사성을 가져오는 데 있어 이 모든 것보다 더 강력한 작용을 하는 것은, 영국과 다른 자유 국가들에서 국가 내 여론의 우세가 완전히 확립되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었던 다양한 사회적 지위들이 점차 평준화되고, 대중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이 확실히 알려졌을 때 그 의지에 저항한다는 생각 자체가 실용적인 정치인들의 마음에서 점점 사라짐에 따라, 순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지지, 즉 다수의 우세에 반대하면서 대중의 것과 다른 의견과 경향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두는 사회 내의 실질적인 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모든 원인이 결합하여 개별성에 적대적인 거대한 영향력을 형성하기에,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대중 중 지성 있는 이들이 개별성의 가치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면, 즉 비록 더 나은 쪽으로 향하지 않거나 그들의 보기에 어떤 것은 더 나쁜 것처럼 보일지라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유익함을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켜내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개별성의 주장이 발휘되어야 한다면, 강제적인 동질화가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인 지금이 바로 그 적기이다. 그 침해에 맞서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초기 단계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닮아야 한다는 요구는 그것이 먹고 자라나는 것들에 의해 더욱 커진다. 삶이 '거의' 하나의 단일한 유형으로 축소될 때까지 저항을 미룬다면, 그 유형으로부터의 모든 일탈은 불경하고 부도덕하며, 심지어는 기괴하고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를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다양성을 보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상상하는 능력조차 빠르게 상실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