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귀르송 백작 부인, 디안 드 푸아 부인께.
아무리 곱추나 옴쟁이 자식이라 해도 자기 자식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는 본 적이 없다. 물론 그 애정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자식의 결함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곳에 쓴 글들은 어린 시절 학문의 첫 껍데기만 맛보았을 뿐, 그저 일반적이고 막연한 윤곽만 머리에 담고 있는 사람의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것을 조금씩 알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전형적인 프랑스식 방식이다. 요컨대, 나는 의학이나 법학, 수학의 네 분과가 있다는 것과 그것들이 대략 무엇을 지향하는지 정도는 안다. 어쩌면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학문의 일반적인 목적도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근대 학문의 제왕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느라 손톱을 깨물거나 특정 학문에 매달린 적은 결코 없다. 첫 줄조차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학문이란 없다. 중급반 학생이라도 나보다 더 박식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첫 수업조차 제대로 검사할 능력이 없다. 만약 억지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매우 서투르게나마 일반적인 대화 주제를 꺼내어 그들의 자연적인 판단력을 시험해 볼 뿐인데, 이는 그들에게도 나에게만큼이나 생소한 수업일 것이다. 나는 플루타르코스와 세네카 외에는 어떤 심도 있는 책과도 교류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서 다나오스의 딸들처럼 끊임없이 퍼 담고 흘려보내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중 조금이라도 이 종이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만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내게 책이란 역사를 읽는 것, 혹은 각별한 애정을 가진 시를 읽는 것이다. 클레안테스가 말했듯, 나팔이라는 좁은 통로에 갇힌 소리가 더 날카롭고 강하게 뿜어져 나오듯이, 시의 수많은 운율 속에 압축된 문장들이 훨씬 더 강렬하게 튀어 올라 나를 더욱 생생한 충격으로 타격하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시험해보려는 나의 자연적인 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 능력이 짐을 이기지 못해 굴복하는 것을 느낀다. 내 개념과 판단력은 더듬거리며, 비틀거리고, 비틀대며 나아갈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나아갔을 때조차도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 너머의 지형을 보지만, 안개에 가려 흐릿하게 보일 뿐이며 그것을 명확히 풀어낼 길이 없다. 내 상상 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려 하고, 오직 나 자신의 자연스러운 수단만을 사용하다 보면, 종종 좋은 저자들이 내가 다루려고 했던 바로 그 주제를 다룬 글과 우연히 마주치곤 한다. 방금 플루타르코스의 상상력의 힘에 관한 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나는 너무나 나약하고 초라하며, 너무나 둔하고 나태하게 느껴져 스스로가 가엾게 느껴지거나 자기혐오가 들기도 한다. 그래도 내 견해가 그들의 생각과 종종 일치한다는 영광을 누리고, 적어도 그 뒤를 멀찍이 쫓아가며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는다. 또한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은 갖지 못한, 그들과 나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비교를 통해 발견한 결점들을 덧대거나 기우지 않고, 내 서툴고 조잡한 창작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 걸으려 한다면 허리 힘이 단단히 좋아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경솔한 작가들은 가치 없는 자기 글 속에 고대 저자들의 글을 통째로 퍼다 날라 명예를 얻으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다. 그 빛깔의 끝없는 차이가 그들의 글을 너무나 창백하고 빛바래고 추하게 만들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여기 두 가지 정반대의 생각이 있다. 철학자 크리시포스는 자기 책 속에 구절뿐만 아니라 타인의 저작물 전체를 섞어 넣었는데, 그중에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폴로도로스는 그 책에서 타인의 글을 모두 도려내면 종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에피쿠로스는 남긴 300권의 저작물 속에 단 하나의 인용문도 넣지 않았다. 얼마 전 나는 우연히 그런 구절을 발견했다. 나는 너무나 창백하고 앙상하며 내용과 의미가 텅 빈 프랑스어 단어들을 쫓느라 맥없이 끌려다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프랑스어 단어들에 불과했다. 길고 지루한 길 끝에서 나는 구름에 닿을 듯 높고 풍요롭고 고상한 문장을 만났다. 완만한 비탈이나 조금 긴 오르막길이었다면 용서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너무나 곧고 가파른 절벽이라 첫 여섯 단어만 읽고도 나는 내가 다른 세상으로 날아오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거기서 나는 내가 출발했던 너무나 낮고 깊은 늪을 내려다보았고, 그 뒤로는 다시 그곳으로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내가 이런 풍부한 약탈물들로 내 글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면, 그것은 나머지 부분들의 어리석음을 너무나도 두드러지게 할 것이다. 남에게서 나의 결점을 찾아내는 것은, 내가 자주 그러하듯 다른 이의 결점을 나에게서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다. 결점은 어디서든 비판해야 하며, 숨을 곳을 없애버려야 한다. 내가 내 도둑질과 대등하게 맞서기 위해, 그들과 나란히 걸어보기 위해 얼마나 대담하게 도전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판관들의 눈을 속여 그 차이를 가려낼 수 있으리라는 무모한 희망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고, 나의 창의력과 힘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옛 거인들과 정면으로 대규모의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그저 작고 가벼운 공격을 주고받을 뿐이다. 나는 그들과 격렬하게 맞붙지 않고 살짝 건드려 볼 뿐이며, 무리해서 나아가기보다는 신중하게 보조를 맞춘다. 만약 내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가장 강한 부분에서만 도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한 일부 사람들처럼 남의 무기로 온몸을 감싸 제 손가락 끝조차 드러내지 않는 짓, 즉 흔한 주제에 대해 학자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옛사람들의 생각을 여기저기 짜깁기하여 자기 것인 양 숨기려는 짓은 첫째로 불의하고 비겁한 짓이다. 내세울 자신의 가치가 없기에 순전히 남의 가치를 빌려 자신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큰 어리석음이다. 사기극을 통해 평범한 대중의 무지한 감탄을 얻는 데 만족할지는 몰라도, 그런 빌려온 장식에 코웃음을 치는 식자들에게는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니 말이다. 오직 그들만이 가치 있는 칭찬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내 경우, 나는 그런 짓을 가장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다른 이들을 인용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함일 뿐이다. 물론 첸토(센토)라고 명시하고 출판하는 작품들은 예외다. 내 시대에도 카필루푸스의 이름을 딴 작품을 비롯하여 고대 작품들 외에도 아주 기발한 것들을 보았다. 그것은 립시우스가 자신의 박식하고 고된 노고가 담긴 『정치학』에서 보여주었듯, 다른 곳에서나 그 안에서나 그들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어리석은 글들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화가가 완벽한 얼굴이 아니라 바로 내 얼굴을 그려 넣은, 대머리에 희끗희끗한 내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이 글들을 숨길 생각이 없다. 이것은 나의 기질과 의견일 뿐이며, 나는 그것을 믿을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믿는 그대로를 내놓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목표하지 않으며, 새로운 가르침이 나를 변화시킨다면 내일의 나는 아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남들에게 믿음을 줄 권위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가 남을 가르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한 사람이 앞선 글을 읽고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담론을 좀 더 펼쳐보았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자, 부인, 만약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바가 있다면, 머지않아 부인의 품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이 작은 아이에게 선물하는 것보다 더 나은 용처는 없을 것이다(부인은 너무나 고귀하시니 아들이 아니면 시작하지 않으실 터이다). 내가 부인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거기서 나올 모든 결실의 위대함과 번영에 나도 일정 부분 권리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부인이 나라는 노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랜 소유권은 부인과 관련된 모든 일에 명예와 축복, 그리고 유익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난관이자 중요한 학문이 바로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농사에서 심기 전의 방식들이 확실하고 수월하며 심는 행위 자체도 그렇듯이, 일단 심어진 것이 생명을 얻고 나면 그것을 키우는 데는 온갖 다양한 방식과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아이를 만드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들지 않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그들을 교육하고 키우기 위해 온갖 수고와 두려움이 뒤섞인 각별한 보살핌을 떠맡게 된다. 그 어린 나이에 드러나는 성향은 너무나 연약하고 모호하며, 그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너무나 불확실하고 거짓될 수 있어 견고한 판단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키몬이나 테미스토클레스,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인물들이 자신과 얼마나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는지 보라. 곰이나 개의 새끼들은 타고난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인간은 곧바로 습관과 의견, 법률 속에 스스로를 내던짐으로써 쉽게 변하거나 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그렇기에 타고난 성향을 억지로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길을 잘못 선택한 탓에 사람들은 종종 헛수고를 하며,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길들이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아이들을 항상 가장 좋고 유익한 길로 인도해야 하며, 어린 시절의 행동에서 얻는 가벼운 예언이나 징후 같은 것에는 크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그의 『공화국』에서 그런 것들에 너무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듯하여 나는 그 점이 마음에 걸린다. 부인, 학문은 귀하와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에게는 훌륭한 장식이며 놀랍도록 유용한 도구입니다. 사실 학문은 천하고 낮은 사람들의 손에서는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학문은 변증법적 논쟁을 꾸미거나 상소 사건을 변론하거나 알약 덩어리를 제조하는 것보다 전쟁을 수행하고, 백성을 다스리고, 군주나 외국과의 우의를 맺는 데 제 능력을 발휘할 때 훨씬 더 자랑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부인, 부인께서도 그 달콤함을 맛보셨고 또 학식 있는 가문 출신이시기에(우리에게는 부인의 남편이신 백작님과 부인이 내려오신 푸아 백작들의 옛 기록이 여전히 남아 있고, 부인의 삼촌이신 프랑수아 드 캉달님께서도 날마다 새로운 학문의 열매를 맺어 부인 가문의 학식에 대한 명성을 여러 세기에 걸쳐 확장하고 계시니까요), 자녀들의 교육에서 이 부분을 잊지 않으시리라 믿으며, 그에 관해 세간의 관습과는 다른 나의 생각을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부인께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아이의 교육 전체 효과가 달려 있는 가정교사를 선택하는 일에는 다른 많은 중요한 요소가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보탤 수 있는 것은 없기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조언을 건네려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보기에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만 내 말을 믿어주면 될 것입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명예나 이익을 쫓는(그러한 비굴한 목적은 뮤즈의 은총과 호의에 어울리지 않으며, 타인에게 의존하게 될 뿐이니까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편의보다는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내면을 가꾸기 위해 학문을 구하는 명문가의 아이에게, 그리고 박식한 사람보다는 유능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아이에게는 머리가 꽉 찬 사람보다는 잘 짜인 머리를 가진 안내자를 선택하도록 신경 써주었으면 합니다. 둘 다 갖추면 좋겠지만, 지식보다는 품행과 이해력을 먼저 요구해야 하며,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새로운 방식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깔때기에 붓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우리 귀에 대고 떠들어대고, 우리의 임무란 그저 그들이 말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그가 이 부분을 바로잡기를 바란다. 즉 처음부터 아이의 영혼이 가진 역량에 맞춰 아이가 사물을 맛보고, 선택하고, 스스로 분별할 수 있도록 시험대에 올려두어야 한다. 때로는 아이에게 길을 열어주고, 때로는 아이 스스로 길을 열게 하라. 나는 선생이 혼자서 지어내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선생은 제자가 차례가 되어 말할 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그 뒤를 이은 아르케실라오스는 먼저 제자들을 말하게 하고 나서야 자신들이 말을 했다. '가르치는 이의 권위는 배우려는 자들에게는 대개 방해가 된다.' 선생은 제자가 앞서서 달리게 하여 그 걷는 모양새를 판단하는 것이 좋고, 또 자신의 힘을 제자에게 맞추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할지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균형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망치고 만다. 이것을 선택하고 올바르게 조절하는 일은 내가 알기로 가장 힘든 과업 중 하나이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행동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은 고결하고 강인한 영혼이 보여주는 결과이다. 나는 내리막길보다 오르막길을 걸을 때 더 확고하고 안전하게 걷는다. 우리의 관습처럼 똑같은 수업과 똑같은 지도 방식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크기와 형태를 가진 여러 영혼을 가르치려 든다면,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그 교육의 정당한 열매를 거두는 아이를 고작 두세 명밖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생은 제자에게 단순히 수업의 내용을 묻지 말고 그 의미와 실질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얻은 배움의 성과를 기억력이 아닌 삶으로 증명하게 하라. 그가 배운 것을 백 가지 얼굴로 나타내게 하고 그만큼 다양한 주제에 적용하게 함으로써, 그가 배운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하라. 이때 플라톤의 교육 방식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음식물을 삼킨 그대로 게워내는 것은 익지 않은 상태이자 소화 불량의 증거이다. 우리가 요리하도록 준 재료를 맛과 형태가 변하도록 만들지 못했다면 위장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타인의 상상력에 얽매여 빚을 지고 움직일 뿐이며, 그들의 가르침이라는 권위 아래 노예가 되어 붙잡혀 있다. 우리는 너무나 밧줄에 묶여 자유롭게 달릴 수 없게 되었고, 우리의 활력과 자유는 꺼져버렸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나는 피사에서 한 점잖은 사람을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너무나도 열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여서 그의 가장 보편적인 신조는 '모든 견고한 상상력과 모든 진리의 척도이자 규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에 부합하는 것'이며 '그 외의 것은 모두 망상이자 공허함'이며 '그가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다소 지나치고 불공정하게 해석된 탓에 과거 로마 종교재판소에서 오랫동안 큰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로 거르듯 검토하게 하고, 단순히 권위에 기대거나 타인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머릿속에 담지 않게 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도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원칙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절대적인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이러한 다양한 판단들을 제시하여 가능하면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의심하는 상태로 남겨두어야 한다.
의심하는 것 또한 아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
만약 그가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견해를 자신의 논리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남을 쫓는 자는 아무것도 쫓지 못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며, 심지어 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왕의 치하에 있지 않으니, 각자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그가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최소한 알게 하라. 그는 그들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해야지 그들의 가르침을 암기해서는 안 된다. 원한다면 그 가르침의 출처를 과감히 잊어도 좋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진리와 이성은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며, 그것을 처음 말한 사람의 것도 나중에 말한 사람의 것도 아니다. 그와 내가 그것을 똑같이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견해도 나의 견해도 아니다. 꿀벌은 이곳저곳에서 꽃을 따지만, 그것으로 만드는 꿀은 전적으로 자신의 것이며, 더 이상 백리향이나 박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타인에게서 빌려온 조각들을 변형하고 융합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그의 판단력, 그의 교육, 그의 노동과 연구는 오직 그것을 형성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가 도움받은 모든 것을 숨기고 오직 자신이 해낸 결과물만을 내놓게 하라. 약탈자나 빌리는 자들은 자신들이 이룬 건물과 구매한 것들을 과시하지, 남에게서 뜯어낸 것들을 과시하지 않는다. 당신은 법관의 향신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쟁취한 동맹과 자식들이 누리는 명예를 보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수익을 공개적으로 셈하지 않으며, 각자 자신이 얻은 소득을 올려놓을 뿐이다.
학문의 이득이란 더 낫고 더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에피카르모스가 말했듯, 보고 듣는 것은 이해력이다. 모든 것을 유익하게 하고, 모든 것을 처리하며, 행동하고 지배하며 군림하는 것은 바로 이해력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눈멀고 귀먹었으며 영혼이 없다. 실로 우리는 이해력에 스스로 무언가를 할 자유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노예적이고 비겁하게 만들고 있다. 누가 일찍이 자기 제자에게 수사학이나 문법, 혹은 키케로의 이런저런 문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마치 그것이 신탁이라도 되는 양, 글자와 음절이 곧 사물의 본질인 것처럼 기억 속에 온통 처박아 둔다. 암기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기억에 맡겨둔 것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올바르게 아는 것은 본을 보거나 책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순전히 책에만 의존하는 지식은 골치 아픈 지식이다. 나는 학문이 기초가 아니라 장식으로 쓰이기를 바란다. 플라톤의 조언을 따라, 굳건함과 믿음과 진실함이 참된 철학이며 그 외 다른 목적을 가진 학문들은 그저 꾸밈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무용수인 팔뤼엘이나 폼페이가 우리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저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도약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이들이 이해력을 뒤흔들지도 않고 가르치려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우리가 연습하지 않고도 말이나 창, 류트나 목소리를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저들이 우리에게 말하거나 판단하는 훈련도 없이 잘 판단하고 잘 말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자, 이러한 배움에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충분한 교재가 된다. 시종의 짓궂음, 하인의 어리석음, 식탁에서의 대화까지,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학습 재료가 된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과의 교류와 외국 방문은 배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우리 프랑스 귀족들의 방식처럼 산타 로톤다가 몇 걸음인지, 시뇨라 리비아의 속바지가 얼마나 화려한지, 혹은 다른 사람들처럼 네로의 얼굴이 저쪽의 낡은 폐허 속에서 어떤 메달의 얼굴보다 얼마나 더 길거나 넓은지 따위를 알아오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기질과 풍습을 주로 배워오기 위해, 그리고 타인의 생각과 부딪히며 우리의 뇌를 갈고닦기 위해, 나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여행을 시작하게 하고 싶다. 우선 한 번의 노력으로 두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언어가 우리와 많이 다른 이웃 나라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길들이지 않으면 혀가 그 언어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를 부모의 품 안에서 키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은 모두가 받아들이는 통념이기도 하다. 자연적인 사랑은 가장 현명한 부모조차 너무 유약하고 무르게 만들어서, 아이의 잘못을 꾸짖거나 아이가 모질고 거칠게 훈련받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게 만든다. 부모는 아이가 운동을 하고 땀과 먼지에 젖어 돌아오거나, 뜨겁거나 차가운 것을 마시거나, 거친 말을 타거나, 노련한 상대와 칼을 맞대거나 처음으로 아퀘버스(총기)를 다루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어린 시절에는 아이를 아껴서는 안 되며, 때로는 의학적 원칙조차 거슬러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일들 속에서 야외의 삶을 영위하게 하라.'
아이의 영혼을 강인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근육 또한 강인하게 단련해야 한다. 영혼을 뒷받침할 육체가 없으면 영혼은 너무나 버겁고, 두 가지 일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나는 내 영혼이 이렇게 연약하고 예민하며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육체와 함께하면서 얼마나 헐떡이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공부를 통해, 스승들이 그들의 저서에서 관대함이나 강인한 용기로 내세우는 사례들이 사실은 살가죽이 두껍거나 뼈가 단단한 것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종종 깨닫는다. 나는 매를 맞아도 나에게는 가벼운 꿀밤보다도 덜하게 느끼고, 맞는 순간에도 혀끝 하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과 여자,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운동선수가 인내심을 발휘하며 철학자 흉내를 내는 것은 사실 마음의 힘이라기보다는 신경의 활력일 뿐이다. 고된 일을 견디는 습관은 곧 고통을 견디는 습관이다. 고통에 적응하고 뼈가 어긋나거나 산통이 오거나 화상을 입는 등의 가혹함을 견디기 위해서는 아이를 고된 노동과 험한 훈련에 익숙하게 단련시켜야 한다.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당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기에 따라 선한 사람을 악인으로 대하는 것처럼 이 마지막 경우도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험대에 올라 있다. 법과 싸우는 자는 선량한 사람들을 매질과 교수형으로 위협한다. 게다가 아이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할 가정교사의 지위는 부모의 존재로 인해 방해받고 끊기기 일쑤다. 더구나 가족들이 아이에게 보내는 존중이나 자신의 가문이 가진 부와 지위에 대한 아이의 인식은 내가 보기에 이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불편함이다. 사람들과의 교류라는 이 학교에서 나는 종종 이런 결점을 목격했다. 남을 알아가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알리는 데만 급급하여, 새로운 것을 얻기보다는 가진 것을 뽐내느라 애쓰는 모습이다. 침묵과 겸손은 대화에 매우 적합한 자질이다. 아이가 지식을 습득했을 때는 그것을 아끼고 절제하도록 가르쳐야 하며, 눈앞에서 하는 어리석은 소리나 헛소리에 굳이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취향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스스로를 바로잡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라. 남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거나 대중의 관습에 반기를 들지 않게 하라. '화려함 없이, 시기심 없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 세상의 거들먹거리는 예의 없는 모습들을 피하게 하라. 또한 남달라 보이기 위해 더 영리한 척하려는 유치한 야심도 경계해야 하며, 마치 비판이나 새로움이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거기서 특별한 가치를 얻으려는 태도도 버리게 해야 한다. 예술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위대한 시인들에게나 허락된 것이듯, 관습을 넘어 특권을 누리는 것 또한 위대하고 고귀한 영혼들에게만 용인되는 일이다. '만약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티포스가 관습이나 통념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자신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위대하고 신성한 덕성으로 그러한 자유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선생은 아이에게 자기와 맞설 만한 가치 있는 상대를 만났을 때만 논쟁에 뛰어들라고 가르쳐야 하며, 그때도 자신이 가진 모든 재주를 다 부리지 말고 오직 가장 유용한 것만을 골라 쓰라고 가르쳐야 한다. 자신의 논리를 선택하고 정돈하는 데 예민하게 만들고, 적절함을 사랑하여 간결함을 유지하게 하라. 무엇보다 진실을 마주하는 즉시 진리 앞에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할 줄 알게 하라. 그것이 상대방의 손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면 어떤 깨달음을 통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든 말이다. 아이는 정해진 대본을 읊기 위해 교단에 서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대의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할 자유를 돈을 받고 파는 그런 직업에도 종사해서는 안 된다. '모든 명령받은 것을 옹호해야 할 그 어떤 필연성도 없다.' 선생이 나와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이의 의지를 군주의 매우 충성스럽고 애정 깊으며 용맹한 신하가 되도록 빚어내되, 공적인 의무 외의 방식으로 군주에게 예속되려는 마음은 식혀주어야 할 것이다. 자유를 훼손하는 다른 여러 불편함 외에도, 보수를 받고 고용된 사람의 판단력은 온전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신중치 못하거나 배은망덕하다는 오명을 쓰기 쉽다. 순수한 궁정 신하들은 수천 명의 다른 백성들 중에서 자신을 선택해 손수 먹이고 키워준 주인에 대해 우호적인 말과 생각 외에는 그 어떤 법도 의지도 가질 수 없다. 그런 호의와 실리는 그들의 솔직함을 적지 않게 타락시키고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관습적으로 그들의 언어가 국가 내의 다른 언어들과 동떨어져 있으며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믿음이 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의 양심과 덕성이 그 말씨에서 빛나게 하고 오직 이성만이 그 행동의 길잡이가 되게 하라. 선생은 아이에게 자기 자신의 담론에서 발견한 잘못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설령 그 잘못을 자신만이 알아챘다 하더라도―그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인 판단력과 진실함의 발로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논쟁하는 것은 낮은 영혼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평범한 자질일 뿐이다. 반면 자기 생각을 수정하고 바로잡으며, 열정적으로 나아가던 도중이라도 잘못된 길을 버리는 것은 드물고 강인하며 철학적인 자질이다. 아이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사방을 두루 살피라고 가르쳐야 한다. 흔히 윗자리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차지하기 마련이고, 부귀와 능력이 결합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식탁 끝에서 태피스트리의 아름다움이나 말바지아 와인의 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른 쪽 끝에서 오가는 많은 훌륭한 대화들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모든 사람의 역량을 살펴야 한다. 소몰이꾼, 석공, 지나가는 사람까지 모두 활용하고 각자 가진 지식에 따라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은 살림에 도움이 되니, 타인의 어리석음과 약점조차도 그에게는 교훈이 될 것이다. 사람마다 가진 태도와 방식의 장점을 가려내어 좋은 것은 따르고 나쁜 것은 경멸하게 해야 한다. 아이에게 모든 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전한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어라. 자기 주변의 특별한 것들, 즉 건축물, 샘물, 사람, 옛 전투지, 카이사르나 샤를마뉴가 지나간 길 등 그 무엇이든 놓치지 않고 보게 해야 한다.
어느 땅이 혹한에 얼어붙고 어느 땅이 열기에 썩어가는지,어떤 바람이 이탈리아로 돛을 잘 실어 나를지.
아이는 저 군주와 이 군주의 풍습, 재력, 그리고 동맹 관계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배우기에 매우 흥미롭고 알기에 매우 유익하다. 사람들과의 이러한 교류 속에서 나는 책 속의 기억으로만 살아가는 인물들 또한 포함하려 한다. 그는 역사라는 수단을 통해 가장 훌륭한 시대의 위대한 영혼들과 교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헛된 공부일지 모르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는 결실을 주는 공부이며, 플라톤이 말했듯 라케다이몬인들이 자신들의 몫으로 남겨둔 유일한 공부이기도 하다. 우리의 플루타르코스가 쓴 위인전을 읽으며 아이가 그 분야에서 얼마나 큰 유익을 얻겠는가? 하지만 나의 안내자는 자신의 임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해야 한다. 제자에게 카르타고의 멸망 날짜를 각인시키기보다는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풍습을, 마르켈루스가 어디서 죽었는지보다는 왜 그가 그곳에서 죽는 것이 자신의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역사를 가르치기보다는 역사를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내 생각에 역사는 우리의 정신이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분야이다. 나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글에서 남들은 보지 못한 백 가지를 읽어냈다. 플루타르코스는 내가 읽어낸 것들 외에도 백 가지를 더 읽어냈고, 어쩌면 저자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 역사는 순수한 문법 공부일 뿐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우리 본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을 꿰뚫어 보는 철학의 해부학이기도 하다. 플루타르코스의 글 중에는 알아두면 좋을 아주 훌륭하고 긴 담론들이 많다. 내 생각에 그는 그런 작업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그저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간 내용들도 수없이 많다. 그는 우리가 원한다면 나아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할 뿐이며, 때로는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찌르는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내용들을 거기서 끄집어내어 쓰임새 있게 만들어야 한다. '아시아인들이 '아니오'라는 한 음절을 발음할 줄 몰라 단 한 사람에게 복종했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라 보에티에게 그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소재와 동기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삶에서 사소한 행동이나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 하나를 골라내어 하나의 담론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이 간결함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들의 명성에는 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우리가 그의 지식보다 그의 판단력을 찬양하기를 바라며,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기보다 그를 향한 갈망을 남겨두기를 원한다. 그는 좋은 일이라도 지나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알렉산드리다스가 에포로스들 앞에서 좋은 내용을 너무 길게 늘어놓은 사람을 두고 '이방인이여, 당신은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지만, 방식이 틀렸소'라고 정당하게 꾸짖은 일을 알고 있었다. 몸이 마른 사람은 옷을 껴입어 부풀리고, 내용이 빈약한 사람은 말로 치장한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인간의 판단력에 놀라운 명석함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웅크리고 있으며, 우리 코끝 정도의 거리밖에 보지 못한다. 소크라테스가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아테네'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답했다. 더 풍부하고 확장된 상상력을 가졌던 그는 온 우주를 자신의 도시로 여기고, 우리처럼 제 발밑만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해 자신의 지식과 교류, 애정을 쏟아부었다. 우리 마을에 포도나무가 얼어붙으면 신부님은 그것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라고 해석하며, 식인종들도 벌써 구내염에 걸렸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우리 내전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무너지고 최후의 심판 날이 우리 목덜미를 낚아채고 있다고 울부짖지 않는 자가 누가 있는가?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이 이미 있어 왔으며, 세상의 수많은 지역은 여전히 평화로운 시절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들의 방종과 면책 특권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 온순하고 부드럽다는 것에 경탄할 뿐이다. 머리 위로 우박이 쏟아지는 자에게는 온 세상이 폭풍과 폭우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보이아인은 프랑스의 그 어리석은 왕이 자신의 운명을 잘 다스릴 줄 알았다면, 자기 공작의 집사가 될 만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상상력은 주인의 지위보다 더 높은 위대함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 이런 오류에 빠져 있다. 이는 막대한 결과와 편견을 낳는 오류다. 그러나 대자연의 위대한 형상을 그 완전한 위엄 속에서 마치 그림처럼 마주하고, 그 얼굴에서 일반적이고 변함없는 다양성을 읽어내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한 왕국 전체를 아주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것처럼 발견하는 사람만이 사물을 그 정당한 크기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이 종 아래 종들을 또 늘려가며 범주화하는 이 거대한 세상은, 우리가 바른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 들여다봐야 할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이것이 내 제자의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그토록 다양한 기질, 학파, 판단, 의견, 법률, 그리고 관습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들을 건전하게 판단하도록 가르쳐 주며, 우리의 판단력이 그 불완전함과 자연적인 나약함을 깨닫도록 훈련해 준다. 이는 결코 가벼운 배움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국가의 격변과 공적인 운명의 변화들은 우리 자신의 운명을 너무 대단한 기적이라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망각 속에 묻힌 그 수많은 이름과 승리와 정복의 역사들은, 고작 병사 열 명이나 자기 멸망으로만 알려진 하찮은 마을을 점령함으로써 우리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는 희망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토록 많은 외국의 화려함이 보여주는 오만과 자부심, 그리고 수많은 궁정과 위대함이 부풀려 놓은 위엄은 우리가 눈을 깜빡이지 않고 우리 자신의 화려함을 견뎌낼 수 있도록 시력을 굳건하게 해준다. 우리보다 앞서 묻힌 수억 명의 사람들은 저 세상에서 그토록 좋은 동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피타고라스는 우리 삶이 올림픽 경기라는 크고 붐비는 모임과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경기에서 영광을 얻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어떤 이들은 이익을 위해 그곳에 물건을 팔러 간다. 그중에는 가장 나쁘지 않은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어떤 다른 열매도 바라지 않고 그저 모든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나는지를 지켜보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판단하고 규율하고자 한다. 철학의 가장 유익한 모든 담론들은 인간의 행위를 그 규칙으로 삼아야 하는 철학에 적절히 맞춰질 수 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엇을 소망하는 것이 옳은지, 거친 돈이 무엇을 유용하게 하는지, 조국과 친애하는 이들에게 얼마를 베푸는 것이 마땅한지, 신께서 너에게 무엇이 되라고 명령하셨는지, 그리고 인간사 속에서 네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우리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공부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용기와 절제,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지, 야망과 탐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예속과 복종, 방종과 자유란 무엇인지, 진실하고 견고한 만족은 어떤 징표로 알 수 있는지, 죽음과 고통, 그리고 수치를 어디까지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라.
'어떻게 각자가 노동을 피하고 견뎌내는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는지,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토록 다양한 동요가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제자의 이해력을 채워주어야 할 첫 번째 가르침은, 그의 품행과 감각을 조절하고, 자신을 알게 하며, 잘 죽고 잘 사는 법을 일깨워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교과 중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학문부터 시작하자. 사실 모든 학문은 우리 삶을 교육하고 활용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며,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목적에 직접적이고 전문적으로 기여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삶의 범위를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한계 안으로 제한할 줄 안다면, 통용되는 학문의 대부분이 우리 삶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통용되는 학문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더 버려두는 것이 나을 법한 매우 불필요한 영역들이 많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공부를 유용성이 필요한 영역으로 국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라. 올바르게 사는 것을 미루는 자는 강물이 다 흐르기를 기다리는 시골뜨기와 같다. 하지만 강물은 흐르고, 또 영원히 굽이치며 흐를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커다란 어리석음이다.
'물고기가 움직이는 것과 사자 자리의 맹렬한 징표, 그리고 서쪽 바다에서의 염소 자리가 움직이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이들 자신의 별자리와 움직임을 알기 전에, 별들의 학문과 제8천구의 움직임을 배우는 것이다.
'플레이아데스 별자리가 나와 무슨 상관이며, 목동자리 별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낙시메네스가 피타고라스에게 편지를 썼다. '죽음이나 예속이 항상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무슨 마음으로 별들의 비밀을 탐구하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당시 페르시아 왕들이 그의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야망, 탐욕, 무모함, 미신에 시달리고 내면에 삶의 다른 적들을 품고 있는데, 과연 내가 우주의 움직임을 고민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아이를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법을 가르친 뒤에는 논리학, 물리학, 기하학, 수사학이 무엇인지 알려주어라. 이미 판단력이 형성된 아이라면 자신이 선택한 학문을 금세 마스터할 것이다. 수업은 대화로 할 때도 있고 책을 통해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가정교사가 교육 목적에 적합한 저자를 직접 찾아 제공할 것이고, 때로는 저자의 핵심과 내용을 미리 잘 씹어서 떠먹여 줄 것이다. 만약 아이가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며 자기 목적에 맞는 훌륭한 담론을 찾을 만큼 능숙하지 못하다면, 필요할 때마다 아이가 섭취하고 소화할 수 있도록 지식을 공급해 줄 학식 있는 사람을 곁에 붙여주면 된다. 이 공부 방식이 가자(Gaza)의 그것보다 더 쉽고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가자의 방식은 따끔하고 불쾌한 규칙일 뿐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고 정신을 일깨울 것도 없는 헛된 말들에 불과하다. 반면 이 방식은 영혼이 무엇을 물어뜯고 무엇을 먹고 자랄지 스스로 발견하게 해준다. 이 결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훨씬 더 빨리 익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철학이 식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아무런 쓰임새도 없고 가치도 없는 헛된 환상적인 이름으로 전락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나는 그 입구를 점령하고 있는 저 궤변들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철학을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찌푸리고 까다로우며 무서운 얼굴로 그려내는 것은 큰 잘못이다. 대체 누가 철학에 이렇게 창백하고 끔찍한 가짜 가면을 씌워 놓았단 말인가? 철학보다 더 즐겁고 씩씩하며 유쾌한 것, 아니 거의 '장난기 어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인 것은 없다. 철학은 오직 축제와 좋은 시간만을 설파한다. 슬프고 얼어붙은 표정은 철학이 머물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문법학자 데메트리우스가 델포이 신전에서 철학자 무리가 모여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들의 그토록 평온하고 즐거운 표정을 보니 심각한 담론을 나누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러자 그중 한 명인 메가라 출신의 헤라클레온이 대답했다. '동사 βαλλω의 미래형에 λ가 두 번 들어가는지 연구하거나, 비교급 χειρον과 βελτιον, 그리고 최상급 χειριστον과 βελτιστον의 어원을 찾는 자들이라면 학문을 논하면서 이마에 주름을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철학의 담론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만들지, 얼굴을 찌푸리게 하거나 근심에 빠뜨리지 않는 법입니다.'
'병든 육체 속에 숨어 있는 마음의 고통을 엿볼 수 있고, 기쁨 또한 엿볼 수 있으니, 얼굴은 그 두 가지 상태를 모두 그대로 취한다.'
철학을 품은 영혼은 그 건강함으로 육체까지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영혼은 자신의 평온함과 안락함을 겉으로까지 빛나게 해야 하며, 외적인 태도를 자신의 틀에 맞게 빚어내어 우아한 긍지와 활기차고 경쾌한 몸가짐, 그리고 만족스럽고 상냥한 표정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지혜의 가장 뚜렷한 표시는 변함없는 즐거움이며, 그 상태는 달 위쪽의 존재들처럼 언제나 맑게 개어 있다. 추종자들을 그토록 지저분하고 칙칙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바로코(Baroco)와 바라립톤(Baralipton) 같은 궤변들이지, 철학 자체가 아니다. 그들은 철학을 전해 듣기로만 알 뿐이다. 어찌 그런가? 철학은 영혼의 폭풍을 잠재우고 굶주림과 열병조차 웃음 짓게 하려 하는데, 그것은 상상 속의 주전원(Epicycles)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이고 명백한 이성을 통해서이다. 철학의 목적은 덕(德)인데, 학파에서 말하듯 깎아지른 듯 험하고 접근 불가능한 산꼭대기에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 다가간 이들은 오히려 덕이 아름답고 비옥하며 꽃이 만발한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발아래의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으며, 길을 아는 자라면 그늘지고 풀이 우거진 향기로운 길을 따라 하늘의 돔처럼 쉽고 부드러운 경사로 즐겁게 오를 수 있다. 이 최고의 덕은 아름답고 승리하며 사랑스럽고 유쾌하면서도 용맹하며, 가혹함과 불쾌함, 두려움과 강압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고 화해할 수 없는 적이다. 또한 자연을 길잡이로 삼고 운명과 쾌락을 동반자로 삼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슬프고 투덜대며 삐딱하고 위협적인 어리석은 형상을 만들어 가시덤불 속 외딴 바위 위에 올려두었으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망령일 뿐이다. 제자의 의지를 덕에 대한 존경만큼이나 깊은 애정으로 채워야 함을 아는 나의 가정교사는, 시인들이야말로 대중의 기질을 따를 뿐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신들이 팔라스의 방보다 비너스의 방으로 가는 길에 땀을 더 많이 흘리게 했다는 사실을 직접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를 느끼기 시작할 때, 그에게 즐길 만한 여인으로 브라다만테나 안젤리카를 제시해 보라. 그리고 억지로 꾸며낸 부드럽고 가식적이며 섬세한 미가 아니라, 사내답지 않지만 남성다운, 순수하고 능동적이며 고귀한 미를 보여주어라. 하나는 미끈한 투구를 쓴 채 사내로 변장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진주 장식 머리띠를 한 채 계집으로 꾸민 모습이다. 만약 그가 프리기아의 저 나약한 목동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의 사랑 또한 사내다울 것임을 그는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가정교사는 아이에게 참된 덕의 가치와 고귀함은 그것을 행하는 과정의 쉬움과 유익함, 그리고 즐거움에 있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덕은 결코 어렵지 않아서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단순한 사람들도 영리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할 수 있다. 덕의 도구는 절제이지 강압이 아니다. 철학의 첫 번째 연인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강함을 의도적으로 내려놓고 순수하고 편안한 진보의 길로 들어섰다. 덕은 인간적 즐거움의 자양분을 주는 어머니와 같다. 덕은 즐거움을 정당하게 함으로써 안전하고 순수하게 만들며, 절제함으로써 그것을 활기차고 생기 있게 유지해 준다. 덕이 거부하는 것들을 잘라냄으로써 우리를 남겨진 것들에 대해 더 갈망하게 만들며, 자연이 원하는 모든 것을 풍족하게 남겨준다. 술 마시는 자가 취하기 전에 멈추게 하고, 먹는 자가 소화불량에 걸리기 전에 멈추게 하며, 방탕한 자가 병에 걸리기 전에 멈추게 하는 절제가 우리 즐거움의 적이라고 억지로 우기지 않는다면, 덕은 어머니처럼 우리가 질릴 때까지, 아니면 지칠 때까지 마음껏 즐기게 해준다. 일반적인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덕은 그것을 피하거나 아예 운 없이 지내면서도 자기만의 또 다른 운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것은 더 이상 변덕스럽게 흔들리지 않는다. 덕은 부유하고 강하며 지혜롭게 되는 법을 알고 사향 냄새 나는 매트리스 위에서 잠들 줄도 안다. 덕은 삶을 사랑하고 아름다움과 영광, 그리고 건강을 사랑한다. 하지만 덕의 고유하고 특별한 임무는 그러한 좋은 것들을 절도 있게 사용할 줄 알고, 그것들을 잃었을 때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다. 이는 험난하기보다 훨씬 고귀한 임무이며, 이것이 없다면 삶의 모든 과정은 부자연스럽고 혼란스러우며 뒤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당하게도 그러한 삶에 암초와 가시덤불, 그리고 괴물들을 결부시키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하도 기질이 달라서 아름다운 여행 이야기나 지혜로운 조언보다는 그저 동화 듣기를 더 좋아한다면, 친구들의 젊은 열정을 일깨우는 북소리에 귀를 닫고 광대들의 놀음판에나 정신을 팔고 있다면, 혹은 승리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오는 것보다 운동 경기에서 상을 받고 무도회에 나가는 것을 더 즐겁고 달콤하다고 여긴다면, 내게는 다른 방도가 없다. 플라톤의 가르침에 따라 아이들을 그 아버지의 능력이 아니라 그 영혼의 적성에 맞게 배치해야 하니, 그를 좋은 도시의 제과점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어린 시절에도 다른 나이와 마찬가지로 철학 수업이 필요한 법인데, 어째서 그것을 아이에게 전해주지 않겠는가?
'진흙은 젖어 부드러우니, 지금 서둘러 날카로운 물레 위에서 쉴 새 없이 빚어내야 한다.'
우리는 삶이 다 지나고 나서야 사는 법을 배운다. 수많은 학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절제에 관한 수업을 듣기도 전에 매독부터 얻어걸린다. 키케로는 두 사람의 삶을 산다 해도 서정 시인들을 공부할 여유를 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 궤변론자들이 그보다 더 비통할 정도로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은 훨씬 더 바쁘다. 아이가 교육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생애 첫 15년이나 16년뿐이며, 나머지는 행동을 위해 쓰여야 한다. 이렇게 짧은 시간을 필요한 교육에 투자하자. 그런 것들은 폐단이다. 변증법의 가시 돋친 미묘함 따위는 다 치워버려라. 그것으로는 삶을 개선할 수 없다. 차라리 철학의 단순한 담론들을 취하여 제대로 선택하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보카치오의 이야기보다 이해하기 쉽다. 아이는 유모 품에서 벗어날 때쯤이면 읽기나 쓰기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잘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철학에는 인간의 탄생을 위한 담론도, 노쇠함을 위한 담론도 있는 법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위대한 제자를 삼단논법을 구성하는 기교나 기하학의 원리에 얽매어두기보다는, 용기와 기량, 관대함과 절제,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확신에 관한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데 더 힘썼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는 이 무기를 갖추게 하여 아직 어린아이였던 알렉산드로스를 보병 3만 명, 기병 4천 명, 그리고 단 4만 2천 에퀴의 자금만을 가지고 세계 제국을 정복하러 보냈다. 그는 말하기를, 알렉산드로스는 다른 예술과 과학들도 존중하고 그 탁월함과 고상함을 칭송했지만, 그것에 즐거움을 느끼기는 했을지언정 직접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고 했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여기서 영혼의 확실한 목표를 구하고, 비참한 노년을 위한 노잣돈을 마련하라.'
이는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 서두에서 한 말이다. '젊은이는 철학하기를 주저하지 말고, 늙은이는 철학하기를 게을리하지 마라.' 다르게 행동하는 자는 아직 행복하게 살 때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이미 그럴 때가 지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이유로 나는 아이를 감금하거나, 성급한 교사의 분노와 우울한 기질에 내버려 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하루에 14~15시간씩 짐꾼처럼 부려 먹으며 고문하고 일하게 하여 아이의 정신을 망치고 싶지 않다. 또한 아이가 고독하고 우울한 성격 탓에 책 공부에 지나치게 무분별하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을 부추기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위는 아이들을 사회적 교류에 무능하게 만들고 더 나은 활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시대에도 학문에 대한 무모한 갈망으로 바보가 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카르네아데스는 학문에 너무 미친 나머지 수염을 깎고 손톱을 다듬을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또한 타인의 무례함과 야만성으로 아이의 고결한 품성을 망치고 싶지도 않다. 프랑스의 지혜는 예로부터 일찍 피고 오래가지 못하는 지혜라는 속담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프랑스의 어린아이들만큼 사랑스러운 존재가 없다는 것을 본다. 하지만 보통 그들은 우리가 품었던 기대를 저버리고,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는 어떠한 탁월함도 보여주지 못한다. 나는 식견 있는 사람들로부터 아이들이 넘쳐나는 지금의 학교들이 아이들을 그렇게 멍청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아이에게는 서재와 정원, 식탁과 침대, 고독과 사교, 아침과 저녁 등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될 것이며 모든 장소가 공부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판단력과 품성을 형성하는 철학은 주된 수업으로서 어디에든 녹아드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웅변가 이소크라테스는 연회에서 자신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한 것이 옳았다고 평가받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지금이 적절치 않고, 지금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웃고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웅변이나 수사학적 논쟁을 늘어놓는 것은 너무나 조화롭지 못한 혼합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학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인간과 그 의무 및 직분에 관해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화의 부드러움 덕분에 연회든 놀이든 철학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모든 현자의 공통된 판단이었다. 플라톤이 자신의 연회에 철학을 초대했을 때, 우리는 철학이 가장 고상하고 유익한 담론을 펼치면서도 얼마나 부드럽게, 그리고 때와 장소에 맞게 참석자들을 즐겁게 하는지 볼 수 있다.
'가난한 자에게든 부유한 자에게든 똑같이 유익하며, 소홀히 한다면 아이와 노인 모두에게 똑같이 해로우리라.'
이렇게 하면 분명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덜 지루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갤러리를 산책하며 걷는 걸음은 비록 그 수가 세 배나 많더라도 목적지를 향해 걸을 때처럼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는 법이다. 이처럼 우리의 수업도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우연처럼 모든 활동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면, 거부감 없이 몸에 밸 것이다. 놀이와 운동 또한 공부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달리기, 씨름, 음악, 춤, 사냥, 말 타기와 무기 다루기 등이 그렇다. 나는 외적인 예의범절과 사교성, 그리고 신체의 태도가 영혼과 더불어 다듬어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교육하는 것은 영혼도 육체도 아닌 바로 사람이며, 그 둘을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그 어느 하나만 따로 훈련할 것이 아니라 같은 멍에를 멘 두 마리의 말처럼 균등하게 이끌어야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육체 운동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정신 또한 그와 함께 단련된다고 보아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더욱이 이러한 교육은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되며, 엄격하면서도 부드럽게 이끌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학문을 권하기는커녕, 실제로는 공포와 잔혹함만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폭력과 강압을 걷어치워라. 타고난 좋은 자질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고 바보로 만드는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아이가 수치심과 벌을 두려워하게 하고 싶다면, 그것에 내성을 갖게 하지 마라. 대신 땀과 추위, 바람과 햇볕, 그리고 맞서야 할 위험에 아이를 단련시켜라. 옷 입고 자고 먹고 마시는 데 있어 모든 나약함과 까다로움을 걷어내고, 무엇에든 적응하게 하라. 그래서 아이가 예쁘장하고 나약한 사내아이가 아니라, 생기 넘치고 건장한 소년이 되게 하라. 나는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노인이 되어서나 항상 그렇게 믿고 판단해 왔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학교가 운영되는 이런 방식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관용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실수하더라도 덜 해로웠을 것이다. 지금의 학교는 붙잡힌 젊음의 진정한 감옥이다. 아이들이 방탕해지기 전에 벌을 주어 오히려 그들을 방탕하게 만들고 있다. 수업 시간에 맞춰 가 보면 들리는 것은 비명 소리뿐이고, 고통받는 아이들과 분노에 취한 스승들의 모습뿐이다. 그토록 연약하고 겁 많은 어린 영혼들의 공부 의욕을 일깨우는 방법치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매를 든 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대체 어떤 방식인가? 참으로 부당하고 해로운 방식이 아닐 수 없다. 퀸틸리아누스가 아주 잘 지적했듯이, 이러한 위압적인 권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며, 특히 우리의 체벌 방식에서 그러하다. 교실 바닥이 피 묻은 회초리 조각보다는 꽃과 나뭇잎으로 더 품위 있게 깔려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그곳에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플로라와 세 명의 여신들을 그려 넣었을 것이다. 철학자 스페우시포스가 자기 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이익이 있는 곳에 그들의 놀이도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는 몸에 좋은 음식에 설탕을 입혀주고 해로운 음식에는 쓸개를 발라두어야 한다. 플라톤이 자기 도시 청년들의 즐거움과 소일거리에 대해 법 속에서 얼마나 세심한 관심을 보였는지, 또 그들의 달리기, 놀이, 노래, 도약, 춤에 얼마나 깊이 몰두했는지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고대의 관습이 아폴론과 뮤즈, 그리고 미네르바라는 신들에게 그러한 활동들의 지도와 후원을 맡겼다고 말한다. 그는 체육관을 위한 수천 가지 규칙을 펼쳐놓았다. 반면 학문적인 과학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며, 음악을 제외하고는 시를 특별히 추천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 관습과 상황에서의 모든 기이함과 특이함은 사회의 적이므로 피해야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궁내관이었던 데모폰이 그늘에서 땀을 흘리고 햇볕 아래서 떨었던 기질을 보고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나는 사과 냄새를 총소리보다 더 피하는 사람도 보았고, 쥐 한 마리에 겁먹는 사람도, 크림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하는 사람도, 깃털 침대 정리하는 것을 보고 기겁하는 사람도 보았다. 게르마니쿠스가 수탉의 모습이나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 이유에 어떤 숨겨진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찍 서둘렀다면 충분히 없앨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육을 통해 나는 맥주를 제외하고는 어떤 음식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육체가 아직 유연할 때 그것을 모든 방식과 관습에 적응시켜야 한다. 식욕과 의지를 잘 통제할 수 있다면, 젊은이가 모든 국가와 집단에 잘 어울리도록, 필요하다면 방종과 과도함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기르는 것이 좋다. 그의 훈련은 관습을 따라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오직 좋은 것만을 하기를 좋아해야 한다. 철학자들조차도 칼리스테네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술잔을 맞추지 않으려다 그의 은총을 잃은 것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그는 왕과 함께 웃고 장난치며 방탕하게 놀 것이다. 나는 그가 방탕한 상황에서조차 동료들을 활기나 굳건함에서 앞서기를 바라며,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힘이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이기를 바란다. '죄를 짓고 싶지 않은 것과 짓는 법을 모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이런 방탕함과 가장 거리가 먼 귀족에게 좋은 자리에서 그가 독일 왕실 업무의 필요 때문에 평생 몇 번이나 취했는지 물어 그에게 경의를 표하려 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는 세 번이었다고 대답하며 그 일화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 능력이 부족해서 그 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데 큰 곤욕을 치른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나는 알키비아데스가 건강을 해치지 않고도 그토록 쉽게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성품을 자주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그는 때로는 페르시아의 사치와 화려함을, 때로는 라케다이몬의 엄격함과 검소함을 능가했으며, 이오니아에서는 향락을 즐기면서도 스파르타에서는 그만큼 절제할 줄 알았다.
모든 빛깔, 지위, 그리고 상황이 아리스티포스에게는 어울렸다.
나는 내 제자를 이와 같이 길러내고 싶다.
'인내심으로 두 겹의 누더기를 걸친 자여, 삶의 방식이 바뀌어도 그에게 어울린다면 나는 경탄하리라, 어색함 없이 그 두 가지 가면을 모두 쓸 수 있는 자여.'
나의 가르침은 이렇다. 배운 것을 아는 사람보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를 보면 그의 말을 듣는 것이고, 그의 말을 들으면 그를 보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이는 '철학을 한다는 것이 여러 가지를 배우고 학문을 다루는 것이라면, 신이시여 제발 그러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모든 학문 중 가장 숭고한 잘 사는 법에 대한 규율을 그들은 문자가 아닌 삶을 통해 추구했다.' 플리우스의 왕 레온이 헤라클리데스 폰티쿠스에게 어떤 학문이나 예술을 전공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예술도 과학도 알지 못하오. 하지만 나는 철학자요.' 사람들은 디오게네스가 무식하면서도 어찌 철학에 관여하느냐고 비난했다. 그러자 그는 '그렇기에 철학을 하기에 더 적합한 것이오'라고 대꾸했다. 헤게시아스가 그에게 책을 좀 읽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참 재미있는 분이시군. 당신은 그림이 아닌 진짜 자연 그대로의 무화과를 고르면서, 왜 자연스럽고 진실하며 기록되지 않은 수련법을 고르지 않으시오?'라고 답했다. 아이는 배운 내용을 말하기보다는 몸소 실천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되풀이할 것이다. 우리는 아이의 일에 신중함이 있는지, 행실에 선함과 정의가 있는지, 말에 판단력과 우아함이 있는지, 병든 와중에도 기운이 있는지, 놀이에 절제가 있는지, 즐거움에 절도가 있는지, 경제생활에 질서가 있는지, 고기든 생선이든 포도주든 물이든 기호에 얽매이지 않는지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학문을 지식의 과시가 아니라 삶의 법칙으로 여기고, 스스로 복종하며 자신의 규율을 따르는 자.' 우리 담론의 진정한 거울은 우리 삶의 행로이다. 제욱시다무스는 왜 라케다이몬 사람들은 용기에 관한 규범을 글로 적어 젊은이들에게 읽히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것은 아이들을 말이 아닌 행동에 익숙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15~16년이 흐른 뒤, 이 아이와 그저 말하는 법을 배우는 데 같은 시간을 쏟은 학교의 라틴어 학자를 비교해 보라. 세상은 온통 잡담뿐이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할 말보다 더 적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의 절반은 그 잡담에 소비된다. 사람들은 우리를 4~5년 동안 단어를 이해하고 문장으로 엮는 데 묶어두고, 다시 4~5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몸통을 구성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게 하며, 최소한 5년은 그것을 미묘한 방식으로 간결하게 섞고 엮는 법을 배우게 한다. 그런 일은 그 분야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맡겨두자. 어느 날 오를레앙으로 가다가 클레리 앞 평원에서 보르도로 향하던 두 명의 교사를 만났는데, 그들은 서로 50보쯤 떨어져 걷고 있었다. 그들 뒤 멀리서 나는 한 무리를 보았고, 맨 앞에는 고인이 된 라 로슈푸코 백작이 있었다. 내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서가던 교사에게 뒤따라오던 저 신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뒤따르는 행렬을 보지 못했기에 자기 동료를 묻는 줄 알고는 우스갯소리로 "저 사람은 신사가 아니라 문법학자고, 나는 논리학자요."라고 답했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문법학자나 논리학자가 아닌 신사를 기르려고 하니, 그들이 자유로운 시간을 낭비하게 내버려 두자. 우리에게는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제자가 지식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면, 말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말이 따라오려 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끌고 올 테니까. 나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머릿속에 수많은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차 있지만, 화술이 부족해 그것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척한다.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다. 내 생각에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그들이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명확히 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어설픈 구상들에서 오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들 자신조차 아직 자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생각을 낳으려다 더듬거리는 것을 보라. 그들의 고통은 출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상에 있으며, 그들은 그저 불완전한 물질을 핥고 있을 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따라, 정신 속에 생생하고 명확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베르가모 방언이든 아니면 말을 못 하는 경우라면 몸짓으로든 반드시 그것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는다.
'말들은 미리 구상한 내용을 기꺼이 뒤따를 것이다.'
어떤 이가 그의 산문에서 시적으로 표현했듯, '사물이 정신을 점유하면 말은 그것을 에워싼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 자체가 말을 낚아챈다.' 그는 탈격, 접속법, 명사, 그리고 문법조차 모른다. 그는 자신의 하인이나 쁘띠 퐁의 생선 장수만큼도 일을 하지 않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을 것이고, 그들의 언어 규칙에 있어서는 프랑스 최고의 인문학 교수들보다도 덜 얽매일 것이다. 그는 수사학도 모르고, 솔직한 독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미리 수를 쓰지도 않으며,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 그 모든 화려한 꾸밈은 소박하고 순수한 진리의 빛 앞에 쉽게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기교는 타키투스가 아페르의 입을 빌려 명확히 보여주었듯, 더 묵직하고 견고한 음식을 소화할 능력이 없는 대중을 즐겁게 하는 데 쓰일 뿐이다. 사모스의 사절들이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에게 와서 참주 폴리크라테스에 대항한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아름답고 긴 연설을 준비했다. 그들의 긴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의 시작이나 서두는 기억나지 않고, 그러니 당연히 중간 내용도 모르겠소. 그리고 결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아주 훌륭한 답변이며, 연설가들은 완전히 콧대가 꺾였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어떤가? 아테네인들이 대규모 건축물을 지을 두 명의 건축가를 뽑으려 할 때, 첫 번째 건축가는 겉치레가 심했고, 그 작업의 주제에 대해 미리 준비한 아름다운 연설을 늘어놓으며 민중의 판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건축가는 세 마디로 끝냈다. '아테네의 영주들이여, 저 사람이 말한 것을 나는 그대로 행할 것이오.' 키케로의 웅변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많은 이가 감탄했지만, 카토는 그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에겐 참 재미있는 집정관이 있군.' 앞서든 뒤서든, 유익한 경구와 아름다운 문장은 언제나 적절한 법이다. 앞뒤 문맥에 어울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하다면 상관없다. 나는 좋은 리듬이 좋은 시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아니다. 원한다면 짧은 음절을 길게 늘어뜨리게 두어라,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독창적인 구상이 빛나고, 정신과 판단력이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면, 나는 그를 좋은 시인이라 부를 것이다. 비록 서툰 시인일지언정.
예리한 감각을 지녔으나, 시를 짓는 데는 서툰 자.
호라티우스가 말하기를, 자신의 작품에서 모든 연결 고리와 운율을 제거하게 하라.
'정해진 시간과 운율, 그리고 순서상 먼저 올 단어를 나중으로 보내고, 마지막 것을 처음으로 돌려놓는다면, 조각난 시인의 파편들 속에서도 그 진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그 본질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 조각들조차 아름다울 것이다. 메난드로스는 희극을 약속한 날이 다가오는데도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고 비난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작품은 이미 구상되어 준비되었으니, 이제 시구만 덧붙이면 되오.' 정신 속에 내용과 소재를 갖추고 있었기에 그는 나머지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롱사르와 뒤 벨레가 우리 프랑스 시에 신뢰를 부여한 이후로, 그들처럼 단어를 부풀리고 운율을 맞추지 않는 애송이를 본 적이 없다. '가치보다 울림이 더 크다.' 대중들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시인이 많아졌지만, 그들이 운율을 흉내 내기는 쉬웠을지언정 한 사람의 풍부한 묘사와 다른 사람의 섬세한 창의성을 따라 하는 데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떤 삼단논법의 궤변으로 그를 압박하면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햄은 갈증을 유발하고, 마시는 것은 갈증을 해소하니, 따라서 햄은 갈증을 해소한다.' 그런 궤변은 비웃어 넘겨라. 그것에 일일이 답하는 것보다 비웃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대응이다. 아리스티포스의 재치 있는 반박을 빌려와 이렇게 말해보라. '모두 묶여 있어서 나를 방해하는데, 내가 왜 굳이 그것을 풀어야 하오?' 누군가 클레안테스에게 변증법적 궤변을 늘어놓자 크리시포스가 말했다. '그런 재주넘기는 아이들이나 데리고 노시오. 어른의 진지한 생각을 그런 것으로 방해하지 말고.' 만약 그런 어리석고 꼬인 가시 돋친 궤변들이 거짓을 믿게 만든다면 위험하겠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저 웃음만 유발한다면 굳이 조심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멋진 단어 하나를 쫓느라 가던 길을 4분의 1리그나 돌아간다. '말을 사물에 맞추려 하지 않고, 도리어 말을 끼워 맞추기 위해 밖에서 사물을 끌어오는 자들'이 그러하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 드는 단어의 화려함에 이끌려 원래 쓰려던 내용이 아닌 다른 것을 쓰는 자들.' 나는 내 글에 꿰매기 위해 아름다운 문장을 비트는 것이, 그것을 찾기 위해 내 글의 흐름을 비트는 것보다 훨씬 더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대로 말은 사물을 섬기고 따라야 하는 법이니, 프랑스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가스코뉴 방언이라도 동원해야 한다. 나는 사물이 우위에 서서 듣는 이의 상상력을 가득 채워, 그가 단어 자체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좋아하는 말투는 종이 위에서나 입에서나 똑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말투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다듬어진 것보다는 생기 넘치고 힘차며, 간결하고 압축적인 강렬하고도 직설적인 말투를 좋아한다.
결국 마음을 찌르는 글귀가 참된 지혜를 담고 있는 법이다.
지루하기보다는 다소 어렵고, 가식과는 거리가 멀며, 자유분방하고 서술이 거칠며 대담하다. 각 조각이 스스로 제 몸을 이루니, 현학적이지도, 수도사 같지도, 법률가 같지도 않으며, 수에토니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문체를 일컬었듯 오히려 군인답다. 그런데 나는 왜 그가 그런 표현을 썼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의 옷차림에서 보이는 방종함을 기꺼이 모방했다. 대각선으로 두른 외투, 한쪽 어깨에 걸친 망토, 제대로 펴지지 않은 양말 등은 외부적인 장식에 대한 경멸적인 오만함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런 태도가 말투에서도 훨씬 더 잘 드러난다고 본다. 프랑스인의 명랑함과 자유로움에 있어 모든 가식은 궁정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군주제 국가에서 모든 신사는 궁정인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소 꾸밈없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나는 연결과 솔기가 드러나는 짜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아름다운 몸에서 뼈와 혈관을 일일이 셀 수 있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진실을 추구하는 연설은 꾸밈없고 단순해야 한다. 역겨울 정도로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정확하게 말하려 하겠는가?' 웅변은 우리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림으로써 사물을 모욕한다.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이하고 관습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소심함의 발로다. 언어에 있어서도 새로운 문장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를 찾는 것은 학구적이고 유치한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리 시장 바닥에서 쓰이는 단어들만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법학자 아리스토파네스는 에피쿠로스의 단어들이 단순하다는 점이나 그의 수사학적 기법의 목적이 오직 언어의 명료함에 있었다는 점을 비판했는데,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말투의 모방은 그 쉬움 덕분에 온 민족이 금세 따라 한다. 하지만 판단력이나 창의성의 모방은 그렇게 빠르지 않다. 대부분의 독자는 비슷한 겉옷을 얻었을 뿐인데도 아주 잘못되게도 그와 비슷한 알맹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힘과 근육은 빌릴 수 없지만, 치장과 겉옷은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수상록』과 똑같이 말하지만,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풍부하고 우아한 말투를 중시했고, 라케다이몬인들은 간결함을, 크레타인들은 언어보다는 개념의 풍부함을 중시했는데, 이들 중 크레타인들이 가장 낫다. 제논은 두 종류의 제자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필롤로고스'라고 부르는, 사물을 배우기를 갈망하는 이들로 그가 총애하는 제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로고필로스'라고 부르는, 오직 언어에만 신경 쓰는 이들이었다. 잘 말하는 것이 아름답고 좋은 일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좋은 것은 아니며, 나는 우리 삶이 온통 그것에만 매달리는 것에 분통이 터진다. 나는 먼저 내 언어를 잘 알고, 내가 가장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이웃들의 언어를 알고 싶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학문이지만,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운다. 나는 여기서 관습보다 더 저렴하게 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내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려 하니, 원하는 사람은 사용해도 좋다. 고인이 된 내 아버지는 학식과 식견을 갖춘 이들을 찾아다니며 훌륭한 교육 방식을 연구한 끝에, 당시 통용되던 교육 방식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공짜나 다름없었던 언어를 배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위대한 정신과 지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유일한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아버지가 찾아낸 해결책은 내가 젖먹이 시절, 말이 트이기 전에 나를 독일인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유명한 의사가 되었는데, 우리말은 전혀 몰랐고 라틴어에는 매우 정통했다. 아버지가 특별히 초빙하여 비싼 몸값을 주고 고용한 그는 끊임없이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나를 따라다니며 첫 번째 스승을 돕도록 학식이 조금 부족한 다른 두 사람을 더 두었는데, 이들 역시 나에게 라틴어 외에는 어떤 언어로도 대화하지 않았다. 나머지 집안사람들에게는 아버지를 포함하여 어머니, 하인, 하녀까지 내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든 나를 상대로 재잘거릴 수 있을 만큼 익힌 라틴어 단어 외에는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 사항이 있었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부모님은 라틴어를 알아들을 만큼 충분히 배웠고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나를 전담하던 다른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우리는 그토록 라틴어에 젖어 살아서 그 영향이 마을 주변까지 퍼져 나갔고, 지금까지도 여러 장인들과 도구들의 라틴어 명칭이 관습적으로 뿌리 내려 남아 있을 정도였다. 나에게는 여섯 살이 넘을 때까지 프랑스어나 페리고르 방언은 아라비아어만큼이나 생소했다. 나는 기술이나 책, 문법이나 규칙도 없이, 매도 눈물도 없이 스승이 알던 것만큼이나 순수한 라틴어를 배웠는데, 이는 그것을 섞거나 변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방식대로 작문을 시키려 할 때면 다른 아이들에게는 프랑스어로 주었지만, 나에게는 나쁜 라틴어로 주어 좋은 라틴어로 바꾸게 했다. 『로마인들의 민회에 관하여』를 쓴 니콜라 그루시,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설한 기욤 게랑트, 위대한 스코틀랜드 시인 조지 뷰캐넌,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인정하는 마르크 앙투안 뮈레 등 나의 가정 교사들은 내가 어린 시절에 라틴어를 너무나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나를 대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고 자주 말했다. 훗날 브리삭 원수 곁에서 만난 뷰캐넌은 자신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쓰고 있으며, 나를 본보기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우리가 훗날 그토록 용감하고 훌륭한 인물로 지켜본 브리삭 백작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거의 전혀 알지 못하는 그리스어에 대해 아버지는 기술적으로 가르치려 했다. 하지만 놀이나 연습의 형태로, 아리스메틱과 기하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하듯 격변화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강압적이지 않고 나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학문과 의무를 즐기게 하고, 엄격함이나 강요 없이 모든 부드러움과 자유 속에서 내 영혼을 키우도록 권고받았다. 나는 심지어 이런 미신까지 말하고 싶다. 어린아이들의 여린 뇌에 충격을 줄 수 있으므로 아침에 갑자기 깨우거나, 우리가 잠든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빠져 있는 잠에서 폭력적으로 억지로 깨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여, 아버지는 항상 악기 소리로 나를 깨우게 했고 나를 섬기는 사람이 곁에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이 예시로 나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의 신중함과 애정을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정교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아버지를 탓할 수는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황폐하고 부적합한 토양이었다. 건강은 아주 튼튼하고 성격은 온순하고 유순했음에도, 나는 너무 느릿하고 무기력하며 잠이 많아서 놀기 위해서조차 게으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고 느끼는 것은 잘했지만, 그런 무거운 기질 아래서 나는 내 나이를 뛰어넘는 대담한 상상과 견해를 키우고 있었다. 정신은 느릿해서 남이 이끄는 만큼만 움직였고, 이해력은 더뎠으며 창의력은 느슨했고 무엇보다 기억력이 형편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그로부터 가치 있는 것을 끌어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둘째로, 격렬한 치료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온갖 조언에 휘둘리듯, 좋은 분이었던 아버지는 자신이 그토록 열정을 쏟은 일에 실패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학들처럼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가는 세간의 통념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내게 첫 번째 교육을 시켜주었던 분들이 더 이상 곁에 없자,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관습에 따라 내가 여섯 살 무렵에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융성했던 기옌 대학으로 나를 보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쏟은 정성과 훌륭한 가정 교사를 선택해주고 나의 교육을 위해 애쓰신 모든 노고는 더할 나위가 없었으며, 대학의 관습을 거슬러 여러 특별한 방식을 유지하려 하셨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여전히 대학 교육이었다. 나의 라틴어는 곧바로 망가졌고, 이후 사용하지 않아 지금은 그 쓰임새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런 익숙하지 않은 교육은 내가 곧바로 상급반으로 건너가게 해 준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열세 살에 대학을 졸업했을 때, 내가 마친 교육 과정은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셈에 넣을 만한 결실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책에 처음 흥미를 느낀 것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우화가 주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7~8세 무렵, 나는 다른 모든 즐거움을 뿌리치고 그 책을 읽곤 했는데, 그 언어가 내 모국어였고 내용 면에서 내 어린 시절의 미숙함에 가장 잘 맞고 이해하기 쉬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랜슬롯』, 『아마디스』, 『보르도의 위옹』 같은 어린 시절의 잡다한 책들에 대해서는 그 이름조차 몰랐고 지금도 그 내용을 모르는데, 내 교육이 그토록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해진 다른 공부에는 더욱 소홀해졌다. 그때 나에게는 내 이런 일탈과 다른 비슷한 행동들을 능숙하게 눈감아줄 줄 아는 식견 있는 스승을 만난 것이 참으로 적절했다. 그 덕분에 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단숨에 읽어 나갔고, 이어서 테렌티우스, 플라우투스, 그리고 이탈리아 희극들을 주제가 주는 즐거움에 이끌려 계속 읽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어리석게도 이 흐름을 끊으려 했다면, 우리 귀족들이 거의 모두 그렇듯 나 역시 대학에서 책에 대한 혐오감밖에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슬기롭게 대처하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그는 내 굶주림을 부추기며 몰래 이 책들을 탐닉하게 하는 한편, 다른 규율 공부를 할 때는 나를 부드럽게 이끌어 주었다. 아버지가 나를 맡길 스승에게 찾던 주된 자질은 성품의 온화함과 유순함이었다. 어쨌든 나의 유일한 결점은 나태함과 게으름뿐이었다. 위험은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누구도 내가 나쁜 사람이 되리라고 예견하지는 않았지만, 쓸모없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들은 악의가 아닌 게으름을 예견했던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느낀다. 내 귀에 들려오는 불평들은 이런 식이다. '그는 게으르고, 우정과 친척 사이의 의무에는 냉담하며, 공적인 일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무관심하다.' 가장 악의적인 사람들조차 '왜 그는 무엇을 가져갔나, 왜 그는 지불하지 않았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왜 그는 베풀지 않는가, 왜 그는 기부하지 않는가?'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그런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자신들의 의무는 강요하지 않으면서, 내가 져야 할 의무도 아닌 것을 더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를 비난함으로써 그들은 행동의 자발성과 그로 인해 내가 받았어야 할 고마움조차 지워버리고 있다. 내가 수동적인 선행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 손에서 나오는 능동적인 선행이 더 무게를 지녀야 마땅할 것이다. 내 재산이 내 것인 만큼 나는 그것을 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고, 나 자신이 내 것인 만큼 나 스스로에 대해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내가 내 행동을 크게 과시할 수 있다면 그런 비난들을 잘 물리칠 수 있을 것이며,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에게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영혼은 동시에 자기 안에서 확고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이 아는 대상들에 대해 명확하고 개방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으며, 그 어떤 소통도 없이 홀로 그것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나는 내 영혼이 강압과 폭력에는 전혀 굴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내가 맡았던 역할들에 나를 투영했던 내 어린 시절의 그 재능, 즉 표정의 자신감과 목소리 및 몸짓의 유연함을 한 번 꼽아볼까? 왜냐하면 나이가 들기 전,
열한 살이 지나고 겨우 열두 살이 되었을 때였으니,
나는 기옌 대학에서 공연된 부캐넌, 게랑트, 뮈레의 라틴어 비극에서 주역을 맡았는데, 이는 당시 그곳에서 품위 있게 상연되었다. 그 분야에서 우리 교장 안드레아스 고베아누스는 다른 모든 직무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단연코 가장 위대한 교장이었고, 나를 그 연극의 주역으로 여겼다. 이것은 명문가 아이들에게 권할 만한 훌륭한 활동이며, 나는 훗날 우리 왕자들도 고대인들의 선례를 따라 직접 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정직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리스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도 그것을 생업으로 삼는 것이 허용되었으니, 비극 배우 아리스톤에게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의 가문과 재산은 고귀했으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기에 기술이 그를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유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어리석다고 생각했고, 실력 있는 배우들에게 우리 도시의 출입을 거부하고 대중에게서 이런 공공의 즐거움을 빼앗는 사람들은 불의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정치는 시민들을 결속하고 화합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는 경건한 종교적 의무뿐만 아니라 운동과 유희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그것을 통해 사회성과 우정이 증진되며, 모든 이가 보는 앞, 심지어 치안 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공연보다 더 절제된 여흥을 그들에게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군주가 아버지와 같은 애정과 선의로 자신의 비용을 들여 때때로 공동체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인구 밀집 도시에는 이런 공연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더 나쁘고 음밀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막아주는 어느 정도의 전환점이 될 테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흥미와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책을 짊어진 당나귀를 만들 뿐이다. 우리는 회초리를 휘두르며 지식으로 가득 찬 책가방을 그들에게 지켜보게 할 뿐이다. 올바른 공부를 하려면 지식을 자기 안에 머물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결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