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들에게 선함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큰 보상이 주어지는 때와 장소는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신임을 얻으려 하는 첫 번째 인물은, 아주 손쉽게 자신의 경쟁자들을 앞지르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무력과 폭력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는 있겠지만, 언제나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상인들이나 시골 판사, 장인들이 귀족들과 대등한 용기와 군사적 지식을 뽐내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공적인 자리나 사적인 자리에서 명예로운 전투를 치르며, 현재의 전쟁터에서 싸우고 도시를 방어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는 군주의 명성도 묻히기 마련이다. 그가 인간애, 진실함, 충성심, 절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로움으로 빛나야 할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흔치 않고 잊혀졌으며 추방당한 덕목들이기 때문이다. 군주가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민중의 의지를 통해서이며, 다른 어떤 자질도 이들처럼 민중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는 없다. 이 자질들이 민중에게 가장 유용하기 때문이다. "선함만큼 대중적인 것은 없다." 이런 잣대를 들이댄다면 나는 위대하고 드문 사람이 되었겠지만, 과거의 어느 시대와 비교하면 나는 그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 시대에는 더 강력한 자질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복수를 절제하고 모욕에 무디며 신의를 지키는 종교적인 사람을 보는 것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중적이지도 않고 유연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타인의 의지나 상황에 맞추어 바꾸지도 않았다. 나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내 신념을 굽히느니 차라리 일이 어그러지는 편을 택하겠다. 요즘 들어 크게 신뢰받고 있는 가식과 기만이라는 새로운 덕목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끔찍하게 증오한다. 모든 악덕 중에서 그만큼 비겁하고 저열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변장하고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비굴하고 노예적인 기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배신을 일삼게 된다.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해지면, 그들은 그것을 어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고결한 마음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내면까지 속속들이 드러내려 해야 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선하거나 적어도 인간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증오와 사랑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온전히 솔직하게 판단하고 말하며, 진실을 위해서는 타인의 찬사나 비난을 개의치 않는 것이 관대한 마음의 의무라고 보았다. 아폴로니오스는 거짓말은 노예들의 몫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자유인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덕의 가장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진실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다른 이유나 실리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자, 그리고 아무에게도 상관없는 일일 때는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는 자는 충분히 진실한 사람이 아니다. 내 영혼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멀리하며, 심지어 거짓말을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한다. 때때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나를 놀라게 하거나 동요하게 만들어 거짓말이 새어 나오면, 나는 내면의 수치심과 날카로운 가책을 느낀다. 늘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해야 할 때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게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악한 짓이다.
나는 그들이 끊임없이 가장하고 꾸며대는 데서 무슨 이득을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진실을 말할 때조차 믿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런 속임수는 사람들을 한두 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항상 숨기겠다고 공언하고, 고대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말이라며 "내 속옷조차 내 진심을 알게 된다면 불태워 버리겠다"거나 "가장할 줄 모르는 자는 통치할 줄도 모른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자신을 상대해야 하는 이들에게 자기 말은 그저 사기이자 거짓말일 뿐이라고 경고하는 것과 다름없다. "누구든 교활하고 간사할수록, 정직하다는 평판을 잃어 더욱 미움을 받고 의심을 산다." 티베리우스처럼 내면과는 항상 다르게 행동하기를 고집하는 이의 얼굴이나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짓이다.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인간관계 속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어떤 것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에 불충실한 자는 거짓에 대해서도 불충실한 법이다. 우리 시대에 군주의 의무를 정립하면서 오직 그 일의 성과만을 고려하고 그것을 신의나 양심보다 우선시했던 이들은, 운명이 모든 일을 단 한 번의 신의 저버림과 약속 위반만으로 영원히 확립할 수 있도록 배치해 준 군주에게나 무언가 조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살면서 한 번 이상의 평화와 조약을 맺게 된다. 첫 번째 불충실함으로 그들을 유혹하는 이득이란 것은, 다른 모든 악행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눈앞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신성모독, 살인, 반란, 배신 등은 모두 어떤 종류의 열매를 얻기 위해 저질러지지만, 그 첫 번째 이득은 나중에 무한한 해악을 가져오며 그 불신에 대한 선례를 남겨 군주를 모든 교류와 협상의 기회로부터 영원히 몰아내고 만다. 오스만 가문의 술레이만은 약속이나 조약을 지키는 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종족이었지만, 내가 어렸을 때 오트란토로 군대를 보냈다가 메르쿠린 데 그라티나레와 카스트로 주민들이 약속된 항복 조건과는 달리 포로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 지역에서 다른 큰 사업들을 벌이고 있던 그에게 있어, 비록 당장의 실리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불신은 장차 무한한 불명예와 불신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첨하거나 위선적인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성가시고 무례한 사람이 되는 편을 택하겠다.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금처럼 온전하고 솔직한 태도를 유지하는 데는 일종의 오만함과 고집이 섞여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워야 할 곳보다 덜 자유로워야 할 곳에서 오히려 조금 더 자유로워지며, 존중을 요구하는 상황에 반발하여 더 흥분하는 듯하다. 아마도 내가 재주가 없어서 타고난 성격대로 내버려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집에서처럼 대인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다 보니, 내 태도가 무례하고 몰상식한 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원래 이렇게 태어난 것 외에도,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을 교묘하게 피하거나 우회적인 방법으로 빠져나갈 만큼 머리가 유연하지 못하다. 진실을 꾸며낼 능력도 없고, 그렇게 꾸며낸 진실을 기억할 만큼 기억력이 좋지도 않으며, 그것을 끝까지 고집할 만큼 담력이 있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나약함 때문에 용감한 척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천성과 계획에 따라 늘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단순함에 나 자신을 맡기며, 그 결과는 운명에 맡긴다. 아리스티포스는 철학에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은 누구에게든 자유롭고 솔직하게 말하는 법을 배운 것이라고 했다. 기억력은 더없이 훌륭한 도구이며, 그것 없이는 판단력도 제구실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게는 그 기억력이 전혀 없다. 누군가 내게 제안하려면 잘게 나누어 말해주어야 한다. 여러 가지 주제가 섞인 이야기에 대답하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첩 없이는 어떤 임무도 받을 수 없다. 긴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그것이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나는 내게 말해야 할 내용을 한 단어씩 암기해야 하는 비열하고 비참한 필요에 매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 기억력이 나를 골탕 먹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태도도, 자신감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수단도 내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시 세 줄을 외우는 데도 나는 세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자기 작품이라면 순서를 바꾸거나 단어를 고치고, 주제를 끊임없이 변주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기 때문에, 작가의 기억 속에 붙잡아 두기가 더 어렵다. 그런데 기억을 의심할수록 기억은 더욱 흐려진다. 우연히 떠오를 때가 더 나으니, 기억을 무심하게 다루어야 한다. 억지로 재촉하면 기억은 당황하고, 일단 흔들리기 시작하면 깊이 파고들수록 더 엉키고 복잡해진다. 기억은 내 시간이 아니라 자기 시간일 때 내게 도움을 준다. 기억에서 느끼는 이 현상을 나는 다른 여러 부분에서도 느낀다. 나는 명령, 의무, 강요를 피한다. 쉽고 자연스럽게 하던 일도 명확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라고 스스로 명령하면 나는 더 이상 할 줄 모르게 된다. 몸조차도, 어느 정도 자유롭고 독자적인 통제력을 가진 신체 부위들은, 내가 그것들을 특정한 시점과 시간에 필연적으로 사용하도록 정하고 붙들어 매면 때때로 복종을 거부한다. 그런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사전 명령은 신체 부위들을 좌절시킨다. 그것들은 공포나 실망으로 움츠러들고 무력해진다. 한때, 술을 권하는 사람에게 응하지 않는 것을 야만적인 결례로 치는 곳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비록 그곳에서 나를 충분히 자유롭게 대해주었지만, 나는 그 나라 풍습에 따라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좋은 동료가 되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평소 내 습관과 천성을 넘어서서 억지로 노력해야 한다는 위협과 준비가 내 목을 꽉 막아버렸기에, 나는 한 방울도 삼킬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식사에 필요한 술조차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내 상상력이 이미 앞질러 마셔버린 술 때문에 나는 이미 취했고 갈증도 해소된 상태였다. 이런 현상은 상상력이 더 격렬하고 강력한 사람들에게 더 명확하게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며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산책할 때 언제나 똑같은 보폭과 거리로 걷는 일에 한 치도 틀리지 않겠지만, 만약 주의를 기울여 그것을 재고 세어본다면 본래 자연스럽고 우연히 하던 일을 의도적으로 할 때는 그렇게 정확하게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골 서재치고는 꽤 훌륭한 내 서재는 집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에 가서 무언가를 찾거나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그 생각이 달아날까 봐 나는 그것을 다른 이에게 맡겨두어야만 한다. 대화 중에 조금이라도 주제에서 벗어날 마음이 생기면 나는 여지없이 그 흐름을 잃어버리고 마는데, 그래서 나는 내 대화가 강제적이고 건조하며 경직되어 있다고 느낀다. 나를 돕는 사람들을 부를 때 나는 그들의 직책이나 출신 지역을 이름 대신 불러야 한다. 이름을 기억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름이 세 음절이라든가, 소리가 거칠다든가, 어떤 글자로 시작하고 끝나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오래 산다면,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조차 내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메살라 코르비누스는 2년 동안 기억의 흔적을 전혀 갖지 못했다. 조르주 트라페준드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 경우를 생각하며, 나는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그리고 이 기억이라는 조각이 없이도 내가 안락하게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남아 있을지를 자주 곱씹어 본다. 그리고 곰곰이 살펴보건대, 나는 이 결함이 완전히 자리 잡는다면 영혼의 모든 기능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렵다.
나는 구멍투성이라, 여기저기로 줄줄 샌다.
내가 세 시간 전에 누구에게 주었거나 받은 암호를 잊어버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키케로가 뭐라 하든 간에, 내 지갑을 어디에 숨겼는지 잊어버리기도 한다. 나는 무언가를 특별히 잘 챙겨두었다가 잃어버리곤 한다. "기억은 철학뿐 아니라 삶의 모든 활용과 모든 예술을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그릇이다." 기억이란 학문을 담는 그릇이자 수납장인데, 내 기억력은 워낙 부실하니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해서 딱히 불평할 처지도 못 된다. 나는 예술의 이름이나 그것이 다루는 내용은 대략 알지만, 그 이상은 모른다. 나는 책을 뒤적일 뿐 깊이 연구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해서 내게 남는 것은 더 이상 남의 것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무언가다. 오직 그것만이 내 판단력이 취한 이득, 즉 판단력이 젖어 든 담론과 상상력이다. 저자, 장소, 단어, 그 밖의 정황들은 곧바로 잊어버린다. 나는 망각에 있어서는 아주 탁월해서 내가 직접 쓰고 구성한 글조차 나머지 다른 것들과 똑같이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내가 눈치채지도 못한 채 항상 내 글을 인용하곤 한다. 누군가 내가 여기 쌓아 올린 구절과 예시들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면, 나는 곤혹스러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나는 그것들을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곳에서만 얻어왔는데 말이다. 나는 그것들이 풍부할 뿐 아니라 출처 또한 부유하고 명예로운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했으니, 이성뿐만 아니라 권위까지 함께 고려한 셈이다. 내 책이 다른 책들의 운명을 따르고, 내 기억이 내가 읽는 것을 내버리듯 내가 쓰는 것을 내버리며, 내가 받는 것을 내버리듯 내가 주는 것을 내버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기억력의 결함 외에도 내 무지에 큰 도움을 주는 다른 결함들이 내게 있다. 내 정신은 더디고 무뎌서 작은 구름만 끼어도 그 끝이 멈춰버린다. 예를 들어, 아무리 쉬운 수수께끼를 내주어도 내 정신은 그것을 풀지 못한다. 아무리 사소한 기교라도 나를 가로막는다. 정신이 작용하는 게임, 즉 체스나 카드, 체커 같은 놀이에서 나는 가장 투박한 형태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내 이해력은 느리고 뒤엉켜 있다. 하지만 일단 무언가를 붙잡으면 그것을 단단히 붙잡고, 그것을 잡고 있는 동안만큼은 아주 보편적이고 긴밀하며 깊숙하게 포용한다. 내 시력은 멀리 볼 수 있고 건강하며 온전하지만, 조금만 일해도 쉽게 지치고 피로해진다. 그런 이유로 나는 타인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책과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없다. 젊은 플리니우스는 이 일을 직접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이런 더딤이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려줄 것이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거친 영혼이라도 특별한 재능 하나쯤은 빛나기 마련이며, 아무리 깊이 잠든 영혼이라도 어딘가 한구석으로는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눈멀고 잠든 영혼이 특정 분야에서만 생기 있고 명료하며 탁월할 수 있는 이유는 전문가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영혼이란 모든 것에 열려 있고 준비된 보편적인 영혼이며, 설령 배우지 못했더라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이다. 내 이런 말은 내 영혼을 탓하려고 하는 소리다. 약함 때문이든 태만함 때문이든 내 영혼은 그처럼 미련하고 무지하다. 사실 내 발치에 있는 것, 내 손안에 있는 것, 삶의 활용과 가장 밀접한 것들을 등한시하는 것은 내 철학과는 아주 거리가 먼데도, 나는 남들이 다 아는 그런 평범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지식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무지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야겠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농사짓는 환경에서 자랐고, 내 이전 소유자들이 물려준 재산을 이어받은 뒤로는 살림과 집안일을 도맡아 왔다. 그런데 나는 주판이나 펜으로 계산할 줄을 모른다.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화폐도 잘 모르고, 곡식의 종류도 아주 확연한 차이가 아니라면 밭에서나 곳간에서나 구분하지 못하며, 내 정원의 양배추와 상추조차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살림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의 이름도, 아이들도 아는 농업의 가장 초보적인 원리도 모른다. 기계 예술, 거래, 상품에 대한 지식, 과일이나 와인, 고기의 다양성과 본질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새를 훈련하거나 말이나 개를 치료하는 법도 모른다. 내 치부를 완전히 드러내자면, 한 달 전쯤 빵을 만드는 데 이스트가 왜 필요한지, 포도주를 담근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라 놀림을 당한 적이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땔감을 솜씨 좋게 묶는 사람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다고 추측했다. 실로 나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것이다. 부엌일 일체를 나에게 맡긴다면, 나는 굶어 죽을 테니 말이다. 내 고백의 이런 대목들을 통해 사람들은 내 흠결을 더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한다면 내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이처럼 낮고 하찮은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에 대해 변명하지는 않겠다. 주제의 저열함이 나를 그렇게 강요할 뿐이다. 누군가 내 기획을 비난할 수는 있어도 내 진행 방식은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남의 조언을 듣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가치 없고 보잘것없으며 내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내 판단력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 있는 글들은 바로 그 판단력의 시도들이니까. 주제의 저열함이 나를 그렇게 강요할 뿐이다. 누군가 내 기획을 비난할 수는 있어도 내 진행 방식은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남의 조언을 듣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가치 없고 보잘것없으며 내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내 판단력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 있는 글들은 바로 그 판단력의 시도들이니까.
"아틀라스조차 짊어지기 싫어할 만큼, 코가 아무리 크고 길다 한들, 라틴어 그 자체를 비웃을 수 있다 한들, 내 하찮은 글에 대해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더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빨로 이빨을 갉아먹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배불리 먹으려면 고기가 필요한 법이다. 헛수고하지 마라. 스스로 감탄하는 자들에게 독기를 품어라. 우리는 이 글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이미 알고 있으니."
나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지 않아야 할 의무는 없다. 단지 그것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있다면 말이다.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내게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어서, 나는 우연히 잘못을 저지르는 법이 거의 없고 늘 고의로 그렇게 한다. 내 기질의 무모함에 어리석은 행동을 보태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 무모함에 습관적으로 악덕까지 보태는 것조차 막아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바르르뒤크에서, 시칠리아의 왕 르네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그가 직접 그린 자화상을 프랑수아 2세 왕에게 바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붓 대신 펜으로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 흉터를 잊고 싶지 않은데, 사실 대중 앞에 내놓기에는 아주 부적절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유부단함이다. 세상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불편한 결함이다. 나는 의심스러운 일들 앞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아니오도, 예도, 내 마음은 온전히 답하지 않네."
나는 의견을 뒷받침하는 것은 잘하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잘하지 못한다. 인간의 일이라는 것은 어느 쪽으로 기울더라도 그를 뒷받침하는 충분한 근거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철학자 크리시포스는 자신의 스승인 제논과 클레안테스에게서 교리만을 배우고 싶어 했는데, 증명과 근거에 관해서라면 자신 스스로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리든 그곳에 머물기 위한 충분한 이유와 그럴듯함을 스스로 찾아낸다. 그렇게 나는 기회가 나를 재촉할 때까지 의구심과 선택의 자유를 내 안에 묶어둔다. 그러고 나서 진실을 고백하자면, 사람들의 말처럼 나는 대개 펜을 바람에 날려 보내듯 운명이라는 이름의 자비에 나를 맡겨버린다. 아주 사소한 성향이나 정황 하나가 나를 휩쓸어가는 것이다.
"마음이 의혹 속에 있을 때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이리저리 휘둘리는 법이다."
내 판단의 불확실성은 대부분의 경우 너무나 균형이 잡혀 있어서, 나는 기꺼이 운이나 주사위 던지기에 결정을 맡길 정도다. 나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큰 통찰을 담아, 신성한 역사조차 우리에게 남겨준 선례들을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의심스러운 일들의 선택 결정을 운명과 우연에 맡기는 관습이다. "제비가 마티아에게 떨어졌다." 인간의 이성은 양날의 검이자 위험한 것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가장 가깝고 친밀한 친구조차 그 이성을 손에 쥐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많은 방면에서 몽둥이가 되는지 보라. 이렇듯 나는 그저 따르는 데에만 적합하며, 쉽게 군중에게 휩쓸린다. 나는 명령하거나 안내를 맡을 만큼 내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다. 만약 불확실한 선택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나는 자신의 의견을 나보다 더 확신하고 나보다 더 강하게 고수하는 사람의 지도를 받는 편을 택하겠다. 내 의견은 그 기초와 토대가 미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무 쉽게 의견을 바꾸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반대 의견들에서도 똑같은 연약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동의하는 습관 그 자체가 위험하고 미끄러워 보인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흔들림과 논쟁을 위한 넓은 장이 펼쳐져 있다.
"마치 저울 양쪽에 똑같은 무게가 눌려 있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것처럼."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 담론은 그 주제에 비추어 꽤 탄탄했으나, 그것을 반박하는 일 또한 매우 쉬웠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한 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 역시 그만큼이나 쉬웠다. 그런 식의 논쟁에는 언제나 답변과 재반박, 재재반박, 재재재반박, 재재재재반박과 같은 대응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우리의 법적 논쟁이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끝없이 길게 늘여놓은 무한한 담론의 구조가 그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상대를 공격하고, 그만큼의 타격을 입으며 상대를 소모시킨다."
이러한 이유들은 경험 외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으며, 인간사의 다양성은 모든 형태에 대한 무수한 사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 시대의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점성술 달력에서 그들이 덥다고 말하는 것을 춥다고, 건조하다고 하는 것을 습하다고 바꾸어, 그들이 예언한 것과 언제나 반대로 말한다면, 그 결과에 내기를 걸 때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단, 크리스마스에 극심한 더위를 예언하거나 성 요한 축일에 엄동설한을 예언하는 등 불확실함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정치적 담론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한다. 어떤 역할을 맡든, 당신은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좋은 위치에 있다. 단, 너무 조잡하고 명백한 원칙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따라서 내 기분으로는 공적인 문제에 있어서, 아무리 나쁜 상태라도 오래되었고 일관성이 있다면 변화와 동요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도덕은 극도로 타락해 있으며, 놀라울 정도로 악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의 법과 관습 중에는 야만적이고 괴물 같은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기 어렵다는 점과 그 붕괴의 위험 때문에, 내가 우리 수레에 쐐기를 박아 그 지점에서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사례들을 든다 해도, 그것보다 더 나쁜 것들이 남아 있다."
내가 우리 국가에서 발견하는 최악의 점은 불안정성이다. 우리의 법은 의복과 마찬가지로 어떤 고정된 형태도 취할 수 없다. 통치 체제의 불완전함을 비난하기란 매우 쉽다. 필멸하는 모든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민중에게 그들의 오랜 관습에 대한 경멸을 심어주기란 매우 쉽다. 그것을 시도한 사람치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없었다. 그러나 파괴된 상태를 대신할 더 나은 상태를 구축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것을 시도했던 많은 이들이 좌절했다. 나는 내 행동에 있어서 내 신중함이 차지하는 비중을 낮게 본다. 나는 기꺼이 세상의 공적인 질서에 나를 맡긴다. 명령하는 자들보다 오히려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이 더 잘 따르며, 그 이유에 대해 고뇌하지 않고 하늘의 흐름에 따라 부드럽게 굴러가는 민중은 행복하다. 이성을 따지고 논쟁하는 자에게 복종이란 결코 순수하거나 평온할 수 없다. 요컨대 나 자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내가 스스로 무언가 있다고 여기는 유일한 점은,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나의 추천 사유는 천박하고 흔하며 대중적이다. 애초에 누가 감각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을 포함하는 명제일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곳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다. 그것은 매우 끈질기고 강력하지만, 환자가 이를 깨닫는 첫 순간 태양의 시선이 자욱한 안개를 꿰뚫고 흩어버리듯 사라지고 만다. 이 주제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변명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은 곧 사면받는 일이다. 제 몫의 감각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짐꾼이나 아낙네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타인의 용기, 신체적 강인함, 경험, 성향, 아름다움의 우월함은 쉽게 인정하지만, 판단력의 우월함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타인의 단순한 자연적 담론에서 비롯된 이유들을 보면, 단지 우리가 그쪽을 바라보기만 했더라면 우리도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만 같다. 타인의 저작물에서 보이는 학식이나 문체 같은 부분은 그것이 우리의 것을 능가하는지 쉽게 알 수 있지만, 지성의 단순한 산물들에 대해서는 누구든 자신도 똑같이 찾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극도로 비교할 수 없는 거리가 있지 않고서는 그 무게와 어려움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타인의 판단력이 얼마나 높은지 명확히 꿰뚫어 보는 자라면, 자신도 그곳에 도달하여 자신의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추천이나 칭찬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종의 연습이자, 별로 이름 없는 방식의 글쓰기일 뿐이다. 게다가 당신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책에 대한 관할권을 쥔 학자들은 학식 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며, 우리 정신이 학식과 예술의 절차를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스키피오 가문의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면, 당신이 하는 말 중에 무슨 가치가 남겠는가? 그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르는 자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자다. 거칠고 대중적인 영혼들은 세련된 담론의 미학을 보지 못한다. 세상은 이 두 부류가 차지하고 있다. 당신이 운 좋게 마주칠 세 번째 부류, 즉 스스로 규율을 갖추고 강건한 영혼들은 너무나 드물어서, 그들은 우리 사이에서 이름도, 지위도 없다.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열망하고 애쓰는 것은 시간의 절반을 낭비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자연이 우리에게 베푼 가장 공정한 선물은 감각이라는 말이 흔히 있는데, 왜냐하면 누구나 자연이 나누어준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닌가? 그것을 넘어 보려는 자는 자신의 시야 너머를 보게 될 뿐이다. 나는 내 의견이 좋고 건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그렇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진 의견이 건전하다는 가장 좋은 증거 중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다는 점이다. 내 의견들이 충분히 확고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 자신에게 쏟는 그 독특한 애정에 쉽게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나는 애정의 거의 전부를 나 자신에게로 돌리고 밖으로는 거의 분출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무수한 친구와 지인들, 그리고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위해 쏟아붓는 그 모든 것을, 나는 내 정신의 평온과 나 자신을 위해 돌린다.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내 담론의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내게는 건강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네."
내 의견들은 나의 무능함을 비난하는 데 한없이 대담하고 단호하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더 많이 내 판단력을 발휘하는 주제다. 세상은 항상 앞만 바라보지만, 나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 그곳에 고정하고 거기에 마음을 둔다. 남들은 저마다 제 앞을 보지만,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으며, 끊임없이 나를 살피고 점검하고 음미한다. 다른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밖으로 향하며, 늘 앞으로 나아간다.
"아무도 자기 자신 안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네."
나는 내 안으로 파고든다. 진실을 가려내는 능력, 그것이 내 안에서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내 믿음을 쉽게 굴복시키지 않는 이런 자유로운 기질은 주로 나 자신에게서 온 것이다. 내가 가진 가장 확고하고 보편적인 생각들은 말하자면 나와 함께 태어난 것들이며, 자연스럽고 오롯이 내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익히지 않은 채 단순하게, 대담하고 강하게 생산해냈지만 다소 혼란스럽고 불완전했다. 그 후 나는 그것들을 타인의 권위와 내가 판단에 있어 일치함을 발견한 고대인들의 건전한 사례를 통해 확립하고 강화했다. 그들은 내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고, 내가 그것을 더 명확하게 향유하고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추구하는 정신의 생기나 기민함 같은 칭송을 나는 절제와 빛나고 두드러진 행동, 혹은 어떤 특별한 역량에서 구한다. 나는 의견과 도덕의 질서, 조화, 그리고 평온함에서 그것을 구한다. "만일 무언가 올바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삶 전체와 개별 행동의 일관성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타인의 본성을 모방하여 자신의 본성을 저버린다면 결코 그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말했던 오만이라는 악덕의 첫 번째 부분에서 내가 느끼는 죄책감의 한계다. 타인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얼마나 잘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대의 기질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과거의 풍요로운 영혼들에 대한 관념이 나를 타인과 나 자신 모두에게 환멸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실제로 우리가 지극히 평범한 것들만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큰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내 처지상 흔히 어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혼의 수양에 관심이 없고, 명예를 유일한 지복으로, 용기를 유일한 완벽함으로 내세우는 이들뿐이다.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나는 기꺼이 칭찬하고 높이 평가한다. 사실 나는 그것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보태어 말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그 정도까지는 거짓말을 허용한다. 하지만 나는 없는 사실을 지어낼 줄은 모른다. 나는 친구들에게서 칭찬할 만한 점을 발견하면 기꺼이 증언해주며, 그들의 가치를 1.5배로 부풀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없는 자질을 그들에게 덧씌우거나, 그들이 가진 결점을 공개적으로 변호할 수는 없다. 심지어 적들에게조차 나는 마땅히 해야 할 명예로운 증언을 분명하게 한다. 내 감정은 변할지언정 내 판단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내 사적인 감정을 그와 관련 없는 다른 상황들과 결코 혼동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내 판단의 자유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기에, 어떤 감정에 휩쓸려 그것을 포기하기란 무척 어렵다. 거짓말을 함으로써 나는 상대방보다 나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력을 다해 전쟁을 치르는 철천지원수에 대해서도 그들의 덕망에 어울리는 만큼 명예롭고 공정하게 이야기하는 훌륭하고 관대한 관습이 있다. 나는 다양한 아름다운 면모를 갖춘 사람들을 꽤 알고 있다. 지성, 마음, 기량, 양심, 언어, 학문 등 저마다 하나씩 장점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위대하며 그토록 많은 아름다운 자질을 한데 갖추었거나, 감탄할 만큼 혹은 우리가 과거의 인물들을 칭송하듯 비교할 만큼 뛰어난 사람은 내 운명상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살아생전 만나본 가장 위대한 인물, 즉 영혼의 본질적인 면에서 가장 고귀한 인물은 에티엔 드 라 보에시였다. 그는 진정 충만한 영혼이었고, 모든 면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옛 가치를 지닌 영혼이었다. 운명만 허락했더라면 학문과 연구를 통해 그 풍요로운 천성을 더욱 드높여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니 분명히 그런 이유가 있을 텐데, 지식이 더 풍부하다고 자처하며 문학적 소명이나 책과 관련된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른 어떤 부류보다 더 많은 허영심과 지적 나약함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기에 그들의 평범한 과오를 용서할 수 없어서이거나, 아니면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그들을 더 대담하게 행동하고 자신의 밑천을 너무 깊이 드러내게 함으로써 스스로 파멸하고 자멸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장인이 귀한 재료를 다룰 때 서투르게 다루거나 작업 규칙을 어기면 하찮은 재료를 다룰 때보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더 잘 드러나는 것과 같다. 금으로 만든 조각상의 결함이 석고상보다 더 거슬리는 법이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 자체로 혹은 제자리에서는 훌륭할 수 있는 것들을 내세우지만, 그것을 분별없이 사용함으로써 지성은 희생시키고 기억력만 과시한다. 또한 키케로, 갈레노스, 울피아누스, 성 히에로니무스를 추어올리면서 정작 자신들은 우스갯거리가 되고 만다. 나는 다시 우리 교육 제도의 무익함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고 싶다. 우리 교육은 우리를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학식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 목표를 달성했다. 교육은 우리에게 덕과 지혜를 따르고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그것의 유래와 어원만을 각인시켰을 뿐이다. 우리는 덕(德)이라는 단어는 변화시킬 줄 알아도 그것을 사랑할 줄은 모른다. 우리는 지혜가 무엇인지 실질적으로나 경험적으로는 알지 못하면서도, 전문 용어나 암기를 통해서는 꿰고 있다. 이웃을 대할 때도 그들의 가문이나 혈연, 인척 관계를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친구로 삼아 교류하고 지내려 하듯이, 교육은 우리와 덕 사이의 친밀함이나 사적인 교감을 쌓으려 하기보다는 덕의 정의, 분류, 구분 같은 것을 마치 족보의 별명이나 갈래처럼 가르쳐놓았다. 교육은 우리 학습을 위해 가장 건전하고 진실한 견해를 담은 책이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책들을 선택했고, 그 아름다운 문구들 사이에 고대의 가장 허황된 기질들을 우리 머릿속에 흘러들게 했다. 올바른 교육이라면 판단력과 도덕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연히 크세노크라테스의 강연을 들으러 갔던 방탕한 그리스 청년 폴레몬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단순히 연사의 웅변술과 역량에 감탄하거나 어떤 아름다운 주제에 대한 지식만을 얻어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전 삶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고 바로잡는다는 더 명확하고 확실한 열매를 거두었다. 우리 교육에서 그런 효과를 느껴본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그대도 예전에 달라진 폴레몬이 했던 것처럼 할 것인가?질병의 표식들을 벗어던지고,붕대와 팔걸이와 스카프를 벗어버릴 것인가, 그가 술에 취해목에서 화환을 몰래 떼어버렸다고 전해지듯,빈속인 스승의 준엄한 꾸짖음을 들은 뒤에 말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멸시받지 말아야 할 부류의 사람들은 소박함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무는 이들인데, 그들은 우리에게 훨씬 질서 정연한 교류를 제공한다. 농부들의 도덕과 언행은 우리네 철학자들보다 참된 철학의 처방에 훨씬 더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현명하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만 알기 때문이다."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내가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 여겼던 이들은, 내 방식대로 깊이 파고들어 보지 못했으니 외양만 본 것이지만, 전쟁과 군사적 역량에 관해서라면 오를레앙에서 전사한 기즈 공과 고인이 된 스트로치 원수였다. 유능하고 범상치 않은 덕을 지닌 인물로는 프랑스의 총리였던 올리비에와 로피탈이 있다. 또한 우리 시대에는 시가 큰 인기를 누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라, 베자, 뷰캐넌, 로피탈, 몽도레, 투르네뷔스 등 이 분야의 훌륭한 장인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어권의 시에 관해서는, 그들이 시를 앞으로 다시는 도달하지 못할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생각하며, 롱사르와 뒤 벨레가 탁월한 부분에 있어서는 고대의 완벽함에 거의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 아드리아누스 투르네뷔스는 동시대나 그 이후의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알았고, 자신이 아는 바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사망한 알바 공과 우리의 몽모랑시 원수의 삶은 숭고했으며, 운명에 있어 여러모로 드문 유사성을 지녔다. 하지만 파리와 국왕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에 맞서 그들을 섬기며, 스스로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군대를 이끌고, 그렇게 고령의 나이에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 맞이한 그의 죽음의 아름다움과 영광은 내 시대의 주목할 만한 사건들 사이에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배신과 비인도주의, 약탈의 진정한 학교와도 같은 양측 군대의 부당함 속에서도 늘 그곳에 몸담았던 뛰어난 군인이자 매우 숙련된 라 누에 씨의 변함없는 선량함, 부드러운 도덕성, 그리고 양심적인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여러 곳에서 내 영적 딸인 마리 드 구르네 르 자르에 대해 내가 가진 희망을 밝히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녀는 확실히 나에게 친부 이상의 애정을 받는 존재이며, 나의 은둔과 고독 속에서 내 본질의 가장 소중한 일부로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나는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을 바라볼 뿐이다. 청춘 시절이 무언가 예견할 수 있는 시기라면, 이 영혼은 언젠가 가장 아름다운 일들을 해낼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아직 그녀의 성별로는 도달할 수 없다고 알려진 저 지극히 거룩한 우정의 완벽함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도덕적 진실성과 견고함은 이미 충분하며, 나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차고 넘칠 정도다. 요컨대 그녀가 나를 만난 나이인 쉰다섯이라는 점 때문에 나의 죽음을 걱정하는 것만 아니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여성이자 이 시대의 인물로서, 그토록 젊은 나이에 홀로 자신의 터전에서 그녀가 초기 『수상록』에 대해 내렸던 판단, 그리고 나를 직접 만나기도 전에 오직 글을 통해 나를 존경하게 되어 오랫동안 나를 사랑하고 갈망했던 그 유명한 열정은 매우 깊이 고찰해볼 만한 사건이다. 이 시대에는 다른 덕목들은 거의 혹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지만, 용기만큼은 우리의 내전 덕분에 대중적인 미덕이 되었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완벽함에 이를 정도로 강인한 영혼들이 우리 사이에 너무나 많이 존재하기에, 그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흔치 않고 비범한 위대함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