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자 내 조상 대부분이 뿌리 내린 곳으로, 그들은 이곳에 애정을 쏟고 이름을 남겼다. 우리는 습관이 되는 모든 것에 점차 둔감해진다. 우리처럼 비참한 처지에서 습관이란 자연이 베푼 매우 고마운 선물인데, 습관은 우리가 겪는 수많은 고통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전은 다른 전쟁보다 더 나쁜 점이 있는데, 바로 우리 각자를 자기 집 안에서 늘 경계하며 살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문과 성벽으로 생명을 지켜야 하고, 제 집의 힘만으로는 좀처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니, 이 얼마나 비참한가!
집안과 가정의 평화 안까지 위협받는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내가 머무는 이곳은 우리 소란의 포격에 항상 가장 먼저 노출되고 가장 마지막까지 시달리는 곳이며, 평화가 온전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는 곳이다.
평화가 찾아왔을 때조차도,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로 떨고 있네.
운명이 평화를 뒤흔들 때마다, 전쟁은 이곳을 지나가니. 차라리 운명이여, 차디찬 북극이나 동방의 대지에 자리를 주거나, 떠돌아다니는 집을 주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나는 때때로 무관심과 나태함에서 이러한 고찰에 맞서 마음을 굳건히 할 방도를 찾는다. 그것들은 또한 우리를 어떤 식으로든 결단으로 이끈다. 나는 종종 치명적인 위험을 상상하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을 어느 정도 즐기곤 한다. 나는 죽음을 고찰하거나 인식하지 않은 채, 마치 한 번의 도약으로 나를 집어삼키고 무미건조함과 무감각으로 가득 찬 강렬한 잠 속에서 순식간에 나를 질식시키는 묵묵하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어리석게도 고개를 숙이고 뛰어든다. 그리고 이런 짧고 격렬한 죽음 속에서 내가 예견하는 결과는 공포의 영향보다 더 큰 위안을 준다. 사람들은 삶이 길다고 해서 가장 좋은 것이 아니듯, 죽음 또한 길지 않기에 가장 좋다고 말한다. 나는 죽은 상태 그 자체보다는 죽어가는 과정과 친밀해지려 한다. 나는 나를 눈멀게 하고 격렬한 돌진으로 순식간에 앗아갈 이 폭풍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숨는다. 만약 어떤 정원사들의 말처럼 장미와 제비꽃이 마늘이나 양파 근처에서 더 향기롭게 피어난다면, 그것은 마늘과 양파가 땅속의 악취를 빨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타락한 본성들이 내 주변의 공기와 기후에 섞인 모든 독기를 빨아들여 그 근접함으로 나를 그만큼 더 선하고 순수하게 만들어준다면, 나는 모든 것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선이란 드물 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대립과 다양성은 선행을 굳건하게 하고 결속시키며, 경쟁에 대한 질투와 영광을 통해 그것을 더욱 불타오르게 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은혜를 훔치는 자들이 나를 특별히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러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너무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비슷한 양심들이 각기 다른 옷차림 아래 깃들어 있다. 비슷한 잔인함, 배신, 절도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법의 그늘 아래에서 더 비겁하고, 더 안전하며, 더 은밀하기에 더욱 악질적이다. 나는 배신적인 가해보다 공공연한 가해를, 평화적이고 법적인 가해보다 전쟁 상태의 가해를 덜 증오한다. 우리의 열병은 이미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몸에 찾아온 것이다. 불은 이미 그곳에 있었고, 불꽃이 붙었을 뿐이다. 소란은 더 커졌지만, 피해는 별로 크지 않다. 여행하는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나는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 잘 알지만, 내가 무엇을 찾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만약 타국에서도 건강한 상태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들의 풍습 또한 우리보다 나을 게 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우선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정말이지 너무나도 다양한 죄악의 모습들이로구나!
둘째로, 나쁜 상태를 불확실한 상태로 바꾸는 것은 언제나 이득이다. 타인의 불행이 우리 자신의 것처럼 우리를 찌르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잊고 싶지 않은데, 나는 프랑스에 대해 아무리 반기를 들어도 파리만큼은 언제나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파리는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훌륭한 것들이 으레 그렇듯, 그 이후로 다른 아름다운 도시들을 많이 볼수록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속에서 더욱 커지고 내 애정을 사로잡는다. 나는 파리 그 자체를 사랑하며, 외국풍의 화려함으로 치장한 모습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더 사랑한다. 나는 파리의 사마귀나 흠집까지도 다정하게 사랑한다. 나는 이 거대한 도시 때문에 프랑스인이라 할 수 있다. 인구가 많고 지리적 위치가 축복받은 도시, 무엇보다도 편의 시설의 다양성과 다채로움에 있어 비할 데 없이 거대하며, 프랑스의 영광이자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장식물 중 하나다. 신께서 우리 사이의 분열을 멀리 쫓아내 주시길 바란다. 나는 파리가 온전하고 통일되어 있다면 다른 어떤 폭력으로부터도 보호받을 것이라 여긴다. 모든 당파 중에서 최악의 당파는 파리를 불화에 빠뜨리는 자들이 될 것이다. 나는 파리에 대해 파리 자신 외에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파리에 대해, 이 국가의 다른 어떤 부분 못지않게 진심으로 걱정한다. 파리가 존재하는 한, 내가 도피할 곳이 없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어떤 도피처에 대한 미련도 버리게 할 만큼 충분한 곳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그것이 내 성미이기 때문인데, 나는 어쩌면 지나친 감이 있지만 모든 사람을 나의 동포로 여기며, 폴란드인을 프랑스인처럼 받아들여 이 국가적 유대보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유대를 우선시한다. 나는 고향의 공기가 주는 달콤함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새롭게 맺은 나만의 인연이 우연히 맺어진 이웃이라는 인연들보다 훨씬 가치 있게 느껴진다. 스스로 쟁취한 순수한 우정이, 기후나 혈연이라는 공통점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보통 더 나은 법이다. 자연은 우리를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은 채 세상에 내보냈건만, 우리는 스스로를 특정 영역 안에 가두고 있다. 마치 페르시아 왕들이 코아스페스 강물만 마시겠다고 맹세함으로써 어리석게도 다른 모든 물을 사용할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위해 세상의 나머지 물을 모두 말려버린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가 생의 마지막에 유배 선고를 사형 선고보다 더 나쁘게 여겼던 것, 나는 내 생각에 결코 그만큼 나약하거나 내 나라에 그토록 좁게 길들여져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하늘 같은 삶들은 내 애정보다는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모습들을 충분히 보여준다. 또 그들 중에는 너무나 고결하고 비범하여 내 상상력으로는 파악할 수조차 없기에 존경으로도 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세상을 자신의 도시로 여겼던 한 사람에게 그런 성향은 매우 다정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여행을 멀리했고 아티카 영토 밖으로 발을 내디딘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이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고, 법이 이미 너무나 타락해 버린 시대에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타인의 주선으로 감옥에서 나가는 것을 거부했던 일은 어떤가? 이런 예들은 나에게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 두 번째 부류는 똑같은 인물에게서 찾을 수 있는 다른 예들이다. 이런 희귀한 예들 중 다수는 내 행동의 능력을 넘어서지만, 어떤 것들은 내 판단력마저 뛰어넘는다. 이런 이유들 외에도 여행은 유익한 운동처럼 보인다. 영혼은 그곳에서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관찰하는 끊임없는 훈련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자주 말했듯이, 삶을 형성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학교는 없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다른 삶과 환상, 관습의 다양성을 제시하고 우리의 본성이 가진 영원한 형태의 변화를 맛보게 하는 것 말이다. 몸은 여행 중에도 나태해지거나 과로하지 않으며, 이러한 적당한 움직임은 몸을 생기 있게 만든다. 나는 담석증을 앓고 있음에도 여덟 시간, 열 시간씩 지루함 없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버틴다.
노년의 분수를 넘어서는 힘.
내리쬐는 태양의 뜨거운 열기 말고는 나에게 적대적인 계절은 없다.
결혼도 했고 나이도 든 내가 왜 여전히 이런 일(글쓰기)을 계속하는지 불평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가정을 우리 없이도 돌아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을 때, 즉 과거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정돈해 두었을 때 집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적절한 시기다. 오히려 집을 지킬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살림을 돌보는 데 소홀한 사람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는 것이 훨씬 경솔한 일이다. 한 가정의 어머니에게 가장 유용하고 고귀한 학문이자 직업은 바로 살림의 지혜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돈을 아끼는 여자는 더러 보았어도, 살림을 알뜰히 꾸리는 여자는 매우 드물다. 살림은 여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며,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할 수도, 구할 수도 있는 유일한 지참금이니 다른 무엇보다 앞서 살펴야 할 덕목이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나는 결혼한 여자에게 다른 어떤 덕목보다도 경제적인 덕목을 요구한다. 내가 집을 비움으로써 그 모든 살림을 온전히 그녀의 손에 맡길 때,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맡기는 셈이다. 나는 여러 가정에서 남편은 한낮이 되어 고단한 일에 지쳐 찌푸린 얼굴로 돌아오는데, 아내는 방에서 머리를 손질하거나 옷을 입느라 부산한 모습을 볼 때면 씁쓸함을 느낀다. 그런 일은 왕비나 할 법한 일인데, 그것마저도 의문이다. 우리 아내들의 나태함이 남편들의 땀과 노동으로 유지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부당한 일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그 누구도 나만큼 자신의 재산을 더 분명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빚 없이 관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편이 재산을 마련한다면, 자연의 섭리상 아내가 그것을 관리하는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부부간의 우애가 집을 비우는 것으로 인해 손상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잦은 동행은 부부 사이의 지적인 교감을 식게 만들며, 지나친 밀착은 오히려 관계를 해친다. 남의 아내는 모두 정숙해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서로 끊임없이 보는 것보다 가끔 떨어졌다가 다시 만날 때 느끼는 즐거움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단절은 나에게 가족을 향한 새로운 사랑을 채워주고 집 생활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준다. 이 변주(변화)는 한쪽으로, 그다음에는 다른 쪽으로 내 애정의 식욕을 돋워준다. 우정은 세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어질 만큼 충분히 긴 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특히 끊임없이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고 그 기억을 일깨워주는 교류가 이어지는 부부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스토아학파는 현자들 사이에 매우 큰 유대와 관계가 있어서 프랑스에서 식사하는 자가 이집트에 있는 동료를 먹여 살리며, 그가 어디에 있든 손가락 하나만 뻗어도 이 세상 모든 현자가 그 도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즐거움과 소유는 주로 상상력에 속한다. 상상력은 우리가 만지는 것보다 우리가 찾아 나서려는 것을 더 뜨겁고 끊임없이 포용한다. 당신의 일상적인 오락을 꼽아보라. 친구가 곁에 있을 때 오히려 그로부터 더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존재는 당신의 주의력을 느슨하게 만들고, 당신의 생각이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로마에 있으면서도 나는 내 집과 그곳에 남겨둔 편의 시설을 다스리고 관리한다. 나는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내 담장과 나무, 수입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본다.
집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장소의 형태가 어른거리네.
우리가 직접 만지는 것만을 누릴 수 있다면, 금고 안에 있는 돈이나 사냥 나간 아이들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더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 정원이 먼가? 반나절 거리라면? 아니, 10리그 거리는 먼가, 가까운가? 만약 가깝다면, 11리그는, 12리그는, 13리그는 어떤가?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끝이 없다. 정말이지 남편에게 몇 걸음째가 '가깝다'의 끝이고 몇 걸음째가 '멀다'의 시작인지 규정할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나는 그녀가 남편을 그 중간 지점에 붙잡아 두도록 충고하고 싶다.
「논쟁을 끝낼 마지막 한 방이 필요하다. 나는 허락된 것을 사용하며, 말의 꼬리털을 뽑듯 조금씩 하나씩 뽑아내리니, 무너지는 더미의 이치에 속아 결국은 다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담대하게 철학을 그들의 구원자로 부른다. 과도함과 부족함, 김과 짧음, 가벼움과 무거움, 가까움과 멂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보지 못하고, 그 시작과 끝도 알지 못하며, 중간에 대해서도 매우 불확실하게 판단하는 철학에 대해 누군가 비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물의 본성은 우리에게 경계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주지 않았다. 이 세상을 넘어 저세상에 가 있는 죽은 이들을 여전히 친구이자 아내로 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현재의 부재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까지도 껴안는다. 우리가 결혼할 때, 알 수 없는 작은 동물들이나 카렌티의 마법에 걸린 자들처럼 마치 개처럼 서로에게 계속 매달려 있기로 계약한 것은 아니다. 또한 아내는 남편의 앞모습에만 눈을 탐욕스럽게 고정하여, 필요한 곳인 뒷모습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토록 뛰어난 화가가 남긴 그들의 기질에 관한 말은, 그들의 불평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적절하지 않겠는가?
아내는 당신이 늦으면, 당신이 사랑하거나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며, 자기 자신은 괴로운데 당신 홀로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아니면 반대와 모순 그 자체가 스스로 관계를 유지하고 살찌우는 것이 아닐까? 즉 그들은 당신을 불편하게만 할 수 있다면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잘 아는 진정한 우정에서 나는 친구에게 내 자신을 끌어오기보다 친구에게 나 자신을 더 내어준다. 나는 친구가 나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내가 친구에게 잘해주는 것을 더 좋아할 뿐만 아니라, 친구가 나에게 하기보다 친구 스스로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을 더 바란다. 그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할 때 그는 나에게 가장 잘해주는 셈이다. 만약 그에게 부재가 즐겁거나 유익하다면 그것은 나에게 그의 현존보다 훨씬 더 달콤하다.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부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우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유익하게 활용한 적이 있다. 우리는 떨어져 지내면서 삶을 더 잘 채우고 확장했다. 그는 나를 위해 살고 즐기고 보고, 나 또한 그를 위해 그러했다. 마치 그가 함께 있는 것처럼 온전하게 말이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면 한쪽은 나태해지곤 했는데, 우리는 서로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짐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의지의 결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육체적 현존에 대한 그 만족할 줄 모르는 굶주림은 영혼의 교감에 있어서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는 주장에 대해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말하고 싶다. 보편적인 의견에 복종하고 남을 위해 자신을 억제해야 하는 것은 젊음의 몫이다. 젊음은 대중과 자기 자신, 둘 모두를 감당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 하나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편의가 줄어드는 만큼 우리는 인위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지탱해야 한다. 젊음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용서하고 나이 듦이 그것을 찾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젊었을 때 나는 즐거운 열정을 신중함으로 감추었고, 늙어서는 슬픈 것들을 방탕으로 풀어낸다. 플라톤의 법이 40세나 50세 이전의 여행을 금지하는 것은 여행을 더 유익하고 교육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오히려 60세 이후의 여행을 금지하는 그 법의 두 번째 조항에 더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이에 먼 길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돌아오기 위해서도, 완주하기 위해서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즐거운 동안 움직이려 할 뿐이고, 산책하기 위해 산책할 뿐이다. 어떤 이익이나 산토끼를 쫓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달리는 자들은 경기를 위해, 그리고 달리기 자체를 훈련하기 위해 달리는 자들이다. 나의 계획은 어디서든 나눌 수 있으며 거창한 기대 위에 세워진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가 그 끝을 맺는다. 내 삶의 여정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고 생각할 만큼 충분히 먼 장소들을 많이 보았다. 크리시포스, 클레안테스, 디오게네스, 제논, 안티파테르와 같이 가장 엄격한 학파의 현인들이 불평할 이유도 없이 그저 다른 공기를 즐기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면, 나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 내 여행의 가장 큰 불만은 내가 머물고 싶은 곳에 거처를 정하겠다는 결심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일반적인 관습에 맞춰 돌아오겠다는 계획을 세워야만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는 것이 두렵거나, 가족과 멀리 떨어져 죽는 것이 더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프랑스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을 것이고 내 교구 밖을 벗어나는 것조차 두려웠을 것이다. 나는 죽음이 끊임없이 내 목이나 허리를 짓누르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만들어졌다. 죽음은 어디서든 같은 것이다. 만약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침대 위보다는 말 위에서, 그리고 내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일은 위로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더 크다. 나는 우리 관례의 이런 의무를 기꺼이 잊고 싶다. 우정의 여러 도리 중 이 작별 인사만큼은 유일하게 불쾌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 크고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하는 것 또한 기꺼이 잊고 싶다. 임종을 지키는 것에서 어떤 편안함이 얻어진다면, 그로 인해 백 가지 불편함이 생긴다. 나는 여러 사람이 임종 때 그 소란스러운 무리에 둘러싸여 불쌍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북적거림이 그들을 질식시킨다. 당신을 평온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그것은 오히려 애정이 부족하고 배려가 없다는 증거다. 누군가는 당신의 눈을, 누군가는 귀를, 누군가는 입을 괴롭히니, 그들이 망가뜨리지 않는 감각이나 신체 부위가 없다. 친구들의 슬픈 곡소리를 듣는 것은 가슴을 아프게 하며, 때로는 가식적이고 가면을 쓴 듯한 다른 곡소리를 듣는 것은 불쾌하기까지 하다. 평소 취향이 섬세하고 약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 절박한 순간에 그에게는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줄 수 있는 부드럽고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다. 아니면 아예 긁어주지 않는 편이 낫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산파가 필요하다면, 세상을 떠날 때는 그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기회를 위해 그런 현명한 친구를 얻어야 한다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것도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그 오만한 기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나는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인 방도로 그 죽음의 순간을 피하고 숨으려 한다. 이 마지막 순간에 나의 불굴함을 증명하거나 보여주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그때가 되면 명성에 대한 나의 모든 권리와 관심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요하고 외로운 죽음, 온전히 나만의 죽음이면 충분하다. 그것은 나의 은둔적이고 사적인 삶에 어울리는 것이다. 로마의 미신과는 반대로, 그들은 말없이 죽어가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서 눈을 감겨주지 않는 사람을 불행하다고 여겼다. 나에게는 남을 위로하기는커녕 나 자신을 위로할 여력조차 충분하지 않으며, 상황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생각들 없이도 머릿속은 이미 생각으로 가득하다. 또 굳이 빌려오지 않아도 나를 다스릴 재료는 충분하다. 이 부분은 사회적 역할이 아니며, 오직 혼자서 치러야 하는 연극이다. 가족과는 함께 살고 웃으며, 죽음과 고통은 낯선 이들 사이에서 맞이하자. 돈을 지불하면 머리를 돌려주거나 발을 주물러줄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만 당신을 대하며, 무심한 표정으로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행동하고 슬퍼하게 내버려 둔다. 나는 매일같이 대화를 통해, 우리의 고통으로 친구들에게 연민과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하는 이 유치하고 비인간적인 성미를 버린다. 우리는 친구들의 눈물을 자아내기 위해 우리의 불편함을 실제보다 과장한다. 그리고 각자가 불운을 견뎌내는 굳건함을 칭송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의 불운에 대해서는 친구들이 함께 슬퍼해주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탓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고통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이 함께 애통해하기까지를 바란다. 기쁨은 확산해야 하지만 슬픔은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이유 없이 엄살을 부리는 사람은 정작 이유가 있을 때도 위로받지 못할 사람이다. 늘 불평하는 것은 결코 위로받지 못하는 지름길이며, 너무 자주 불쌍한 척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가련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자는 산 채로 죽은 취급을 당할 위험이 있다. 나는 안색이 좋고 맥박이 안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치유의 증거인 웃음을 참아야 했고, 슬퍼할 이유가 사라진 건강을 미워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는 병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 할 뿐이며, 나쁜 예후를 암시하는 말이나 꾸며낸 탄식은 피한다. 기쁨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곁에 있는 이들의 차분한 태도는 현명한 환자 곁에 어울리는 것이다. 다른 상태를 대면하기 위해 병은 결코 건강과 다투지 않는다. 병은 다른 이에게서 건강하고 온전한 모습을 지켜보길 원하며, 적어도 함께함으로써 그 건강을 즐기길 원한다. 아래로 녹아내리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그는 삶에 대한 생각을 전혀 버리지 않으며, 세속적인 대화도 피하지 않는다. 나는 건강할 때 병을 공부하고 싶다. 막상 병이 찾아오면 상상력의 도움 없이도 그 현상이 충분히 실감 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결심한다. 말을 타야 할 시간이 되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떠날 시간을 미룬다. 나는 내 행동 방식에 대한 공개적인 기록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규칙이 되어준다는 예상치 못한 이점을 느낀다. 나는 때때로 내 인생의 역사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러한 공개적인 선언은 나 자신을 지키고 내 삶의 모습을 부정하지 않도록 강제한다. 내 삶은 오늘날의 악의적이고 병든 판단들이 묘사하는 것보다 대체로 덜 왜곡되고 덜 모순된 모습이다. 내 행동 방식의 균일함과 단순함은 이해하기 쉬운 인상을 주지만, 그 방식이 다소 새롭고 관습에서 벗어나 있기에 오히려 험담하기 좋은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물론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비난하고자 한다면, 나는 내가 이미 시인하고 알려진 나의 불완전함 속에서 그가 물어뜯을 충분한 먹잇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허공에 대고 싸울 필요 없이 내 불완전함으로 마음껏 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 그 비난과 폭로를 앞질러서 그가 내 무는 힘을 앗아갔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과장과 확대라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욕에는 정의를 넘어선 그들만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 안에서 뿌리를 발견한 악덕들을 나무로 키워내게 하라. 내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악덕뿐만 아니라 나를 위협하기만 하는 것들까지도 모두 사용하게 하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공격하기 좋은 악덕들이니 말이다. 그걸로 나를 공격하게 하라. 나는 기꺼이 철학자 디온의 사례를 따를 것이다. 안티고노스가 그를 출신 성분으로 조롱하려 하자, 그는 말을 잘랐다. "나는 노예이자 도살업자, 낙인찍힌 자와 그가 신분이 낮아 결혼했던 창녀의 아들이오. 두 사람 모두 어떤 죄로 벌을 받았지. 한 웅변가가 어린 나를 보고 잘생기고 싹수가 있어 보여서 사들였고, 죽으면서 전 재산을 나에게 남겼소. 나는 그것을 아테네로 가져와 철학에 정진했지." 역사가들이 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찾느라 애쓸 필요는 없다. 내가 사실대로 말해줄 테니까. 관대하고 자유로운 고백은 비난을 무력화하고 모욕의 무기를 빼앗는 법이다. 어쨌든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나를 지나치게 칭송하는 경우만큼이나 근거 없이 비하하는 경우도 잦은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명예의 서열과 등급에 있어서도 내게 마땅한 자리보다 오히려 더 높은 자리를 내어준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차라리 이런 서열이 정해져 있거나 아예 무시되는 나라에서 더 편안할 것 같다. 남성들 사이에서 길을 걷거나 앉는 우선권에 대한 다툼이 세 번 이상 오가면 그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다. 나는 그런 성가신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양보하거나 부당하게 행동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우선권을 가지려 할 때 그 자리를 탐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결코 그에게 그것을 양보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이익 외에도, 내가 기대하는 또 다른 이익이 하나 더 있다. 만약 내 성향이 마음에 들어 나와 뜻이 맞는 정직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죽기 전에 우리 관계를 맺으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긴 세월 동안의 지식과 친분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는 이 기록을 통해 사흘 만에 보았을 테고, 그것도 더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나는 사적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것을 공적으로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장 은밀한 지식이나 생각에 관해서는 내 가장 충실한 친구들을 서점으로 보내버린다.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을 털어놓는다.
이렇게 좋은 징조가 보였다면,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을 알았더라면 분명 나는 그를 찾으러 아주 멀리까지 갔을 것이다. 내 생각에 잘 맞고 유쾌한 동행이 주는 즐거움은 아무리 비싼 값을 치러도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아, 친구란 도대체 무엇인가! 친구와의 관계가 물과 불이라는 요소보다 더 필요하고 달콤하다는 옛 격언은 얼마나 옳은 말인가!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러니 멀리 떨어져 홀로 죽음을 맞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을 위해서도 지금 이 상황보다 덜 수치스럽고 덜 흉측한 곳으로 물러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병에 시달리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비참함으로 대가족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인도 어느 지역의 사람들은 그런 처지에 빠진 자를 죽이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그를 홀로 버려두어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게 했다. 그들이 결국 누구에게 지루하고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일반적인 봉사로는 거기까지 미칠 수 없다. 당신은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강제로 잔인함을 가르치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내와 아이들까지도 당신의 고통을 더 이상 느끼거나 가엾게 여기지 않도록 무뎌지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산통 섞인 탄식은 이제 누구에게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설령 그들의 대화에서 우리가 어떤 즐거움을 얻는다 해도(신분의 차이 때문에 경멸이나 질투가 쉽게 생겨나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평생을 그렇게 의지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볼수록 나는 그들의 고통이 더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에게는 서로 의지할 권리는 있지만, 타인을 너무 무겁게 짓누르거나 그들의 파멸 위에 우리 자신을 지탱할 권리는 없다. 마치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들의 피를 쓰려고 그들을 죽이게 했던 사람이나, 자신의 늙은 몸을 밤새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달콤한 숨결을 자신의 시고 무거운 숨결과 섞기 위해 젊은 아이들을 곁에 두었던 또 다른 사람처럼 말이다. 노쇠함은 고독한 성질의 것이다. 나는 과할 정도로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이제 내 성가심을 세상의 눈앞에서 거두어 홀로 감싸 안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북이처럼 내 껍질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숨어서, 사람들을 대하되 그들에게 집착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겠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일 테니 말이다. 이제 사람들과 등을 돌릴 시간이다. 하지만 그런 여행길에 오르면 당신은 온갖 것이 부족한 비루한 오두막에서 비참하게 발이 묶이고 말 것이다.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가지고 다닌다. 더구나 운명이 우리를 덮치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재간이 없다. 내가 아플 때 거창한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자연이 나에게 할 수 없는 일을 약 한 알이 해내길 바라지도 않는다. 열병이나 나를 쓰러뜨리는 질병이 시작될 때면, 나는 아직 정신이 온전하고 건강이 조금 남아 있을 때 기독교의 마지막 의식을 통해 신과 화해한다. 그러면 훨씬 마음이 가볍고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어, 병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그만큼 나아지는 것 같다. 나는 의사보다 공증인이나 변호사가 훨씬 덜 필요하다. 건강할 때 정리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아플 때 처리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죽음을 대비해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미리 해둔다. 하루도 미루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해두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택을 망설였기 때문일 텐데, 가끔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잘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소수의 사람들과 짧은 세월을 위해 쓴다. 오래 남을 만한 주제였다면 더 견고한 언어로 썼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언어가 겪어온 끊임없는 변화를 고려할 때, 오늘날의 형태가 50년 후에도 쓰이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언어는 매일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으며, 내가 살아온 동안에도 이미 절반은 변했다. 우리는 지금의 언어가 완벽하다고 말하지만, 모든 시대가 자기네 언어가 그렇다고 말해왔다. 언어가 계속 흘러가고 변형되는 마당에 그것을 고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훌륭하고 유용한 저술들이라면 그 언어를 고정할 수 있겠지만, 그것의 운명은 우리 국가의 운명에 달렸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소비될 사적인 내용들을 적어 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지식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이들만이 알 수 있는 특수한 지식에 관한 것들이다. 결국 나는 죽은 사람들의 기억이 자주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는 이렇게 판단했고 이렇게 살았으며, 이것을 원했다. 만약 죽기 직전에 그가 말했다면 이런 말을 했거나 이런 것을 남겼을 것이다. 내가 그를 다른 누구보다 잘 안다'라고 떠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품위가 허락하는 한 나는 여기에서 내 성향과 애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정보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구두로 더 자유롭고 기꺼이 이야기할 것이다. 어쨌든 이 기록들을 훑어보면 내가 모든 것을 말했거나 다 암시해두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진실로 이 작은 흔적만으로도 날카로운 마음이라면, 그 나머지 것들을 스스로 알아낼 수 있으리라.
나는 내 자신에 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거나 추측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이 사실대로 정확히 말해지기를 바란다. 설령 나를 명예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살았던 모습과 다르게 나를 묘사하는 자가 있다면, 저세상에서라도 돌아와 그를 부정하고 싶다. 살아 있는 사람들조차 그들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이야기되는 것을 나는 늘 느낀다. 내가 잃은 한 친구를 내가 죽을힘을 다해 변호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를 천 가지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찢어놓았을 것이다. 내 나약한 성미에 대해 끝으로 덧붙이자면, 여행 중에 숙소에 도착할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병들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편안할 수 있을지 상상하곤 한다. 나는 소란스럽지 않고 침침하거나 눅눅하지 않으며 답답하지 않은, 나만의 아늑한 공간에 머물고 싶다. 나는 이런 사소한 환경을 통해 죽음을 달래려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 외에 다른 어떤 방해 요소도 없이 온전히 죽음만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죽음은 다른 번거로움 없이도 충분히 무거운 짐이 될 테니까. 나는 죽음이 내 삶의 안락함과 편의에 한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앞으로도 지난날과 다를 바 없기를 기대한다. 죽음에도 더 편안한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가 있으며, 저마다의 생각에 따라 성질도 다양하다. 자연적인 죽음 중에서는 기력이 쇠하고 무거워지며 찾아오는 죽음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진다. 급작스러운 죽음 중에서는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무너지는 건물에 깔리는 것이, 칼에 베이는 것보다는 총탄에 맞는 것이 상상하기가 덜 끔찍하다. 나는 카토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기보다는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마시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결과는 하나일지라도, 내 상상 속에서는 타오르는 용광로에 몸을 던지는 것과 잔잔한 강물에 몸을 맡기는 것은 삶과 죽음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이처럼 어리석게도 우리의 두려움은 결과보다 수단에 더 얽매인다. 죽음은 한순간일 뿐이지만 그 무게는 너무나 커서, 내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삶의 며칠을 바칠 용의가 있다. 사람마다 죽음의 고통을 다르게 느끼고 저마다 죽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아가 죽음에서 모든 불쾌함을 덜어낼 방법을 찾아보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함께 죽음을 맞이했듯이, 그것을 쾌락적인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물론 철학과 종교가 만들어내는 혹독하고 모범적인 죽음의 노력들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 중에는 로마의 페트로니우스나 티길리누스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서도 부드러운 준비로 죽음을 잠재우듯 맞이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평소 즐기던 나태한 오락의 흐름 속으로 흘려보냈다. 창녀들과 좋은 동료들 사이에서 위로의 말도, 유언에 대한 언급도, 인위적인 굳건함도, 미래의 처지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그저 놀이와 축제, 익살과 평범하고 대중적인 대화, 음악과 연애 시들이 오갔을 뿐이다. 우리는 좀 더 고상한 태도로 그런 결연함을 흉내 낼 수 있지 않을까? 어리석은 자에게도 좋은 죽음이 있고 현자에게도 좋은 죽음이 있다면, 그 중간에 있는 우리에게도 좋은 죽음을 찾아보자. 내 상상력은 죽음에 대해 어떤 쉽고, 죽어야만 한다면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해준다. 로마의 폭군들은 사형수에게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마치 생명을 주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그토록 섬세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운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조차 키케로가 라틴어로 옮긴 이 시구를 감히 말해야만 하는 이치에 굴복하지 않았던가?
삶을 다스리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운명이다.
운명은 내 삶이라는 시장을 쉽게 거래하도록 돕고 있다. 그것은 내 삶을 더 이상 내 가족들에게 짐도, 방해도 되지 않을 지점에 안착시켜 주었다. 이것은 내 나이의 어느 시절에라도 받아들였을 조건이지만, 지금처럼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짐을 꾸려야 할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들에게 기쁨도 슬픔도 주지 않게 된 점이 특히 더 기쁘다. 운명은 교묘한 보상을 통해, 내 죽음으로 물질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이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손실도 동시에 입도록 만들었다. 죽음은 흔히 우리 자신에게 무겁게 다가오는데, 그것은 죽음이 타인에게도 무게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이해관계와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가 거의 똑같거나, 때로는 오히려 더 많이 얽히게 된다. 내가 찾는 숙소의 편안함이란 화려함이나 거창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나는 그런 것들을 싫어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기교가 적고 자연이 스스로 베푼 은총으로 꾸며진 장소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단순하고 정갈한 환경이다. "잔치는 거창할 필요 없이 깔끔하면 된다. 비용보다는 재치가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 한겨울에 일을 보러 그리종을 지나다가 길 위에서 이런 극한 상황을 맞는 것은 바쁜 이들이나 겪을 일이다. 나는 주로 즐거움을 위해 여행하기에 나름 잘 처신하며 다닌다. 오른쪽 길이 험하면 왼쪽으로 가고, 말 타기 힘든 몸 상태라면 멈춰 선다. 그렇게 하면 사실 내 집만큼 즐겁고 편안하지 않은 곳은 없다. 물론 나는 과함은 언제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지나친 세련미나 풍요로움 속에서도 번거로움을 느낀다. 뒤에 놓쳐버린 볼거리가 있다면 되돌아가는데, 그것이 곧 내 길이 된다. 나는 직선이든 곡선이든 어떤 확실한 노선을 정해두지 않는다. 목적지에 갔는데 들었던 것과 다르면 어떻게 하냐고? 다른 이들의 평가가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틀렸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내 수고를 탓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말하던 것이 그곳에는 없다는 사실을 배웠을 뿐이다.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체질과 평범한 취향을 지니고 있다. 나라마다 다른 관습의 다양성은 단지 다양함이 주는 즐거움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모든 관습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접시가 주석이든, 나무든, 흙이든, 삶은 것이든 구운 것이든, 버터든 호두기름이나 올리브유든, 뜨겁든 차갑든 내게는 모두 똑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런 관대한 성미를 탓하게 되었다. 이제는 좀 까다롭게 선택함으로써 내 식욕의 절제를 돕고 때로는 위장을 편하게 해주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프랑스 외의 지역에 머물 때 친절을 베푼다며 프랑스식으로 대접할지 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웃어넘기며, 언제나 가장 북적이는 외국인들의 식탁으로 뛰어들곤 했다. 나는 우리 동포들이 자신의 관습과 다른 방식을 혐오하며 멍청한 기분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면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불안해한다. 어디를 가든 자기 방식만을 고수하고 다른 나라의 풍습을 혐오한다. 헝가리에서 동포라도 만나면 그 우연에 환호하며, 서로 결속하고 뭉쳐서 그들이 보는 온갖 야만적인 관습들을 비난하기 바쁘다. 왜 야만적이지 않은가, 프랑스식이 아니니까! 그중에서도 좀 배웠다는 자들은 비난하려고 풍습을 파악할 뿐이다. 대부분은 돌아오기 위해 떠날 뿐이다. 그들은 낯선 공기에 오염될까 두려워 묵묵부답의 불통스러운 신중함 속에 자신을 숨기고 웅크린 채 여행한다. 그들에 대해 말하다 보니 문득 우리 젊은 궁신들에게서 보았던 비슷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자기 부류의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며, 우리를 마치 다른 세상 사람 보듯 경멸하거나 동정한다. 궁정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빼앗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된다. 우리에게 서툰 만큼 그들에게도 우리는 생소한 존재인 셈이다. 참된 신사는 조화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정말 옳다. 반대로 나는 우리 관습에 질려 여행을 떠난다. 시칠리아에서 가스코뉴 사람을 찾으려는 게 아니다. 고향에 충분히 남겨두고 왔으니까. 나는 차라리 그리스인이나 페르시아인을 찾고 싶다. 그들과 사귀고 그들을 관찰하며, 그곳에 나를 내어주고 나를 쏟아붓는다. 게다가 나는 우리 관습만큼이나 가치 없는 방식을 거의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거의 하룻밤도 묵지 않는다. 내 집의 풍향계를 시야에서 놓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길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우연한 동행은 즐거움보다는 불편함이 더 크다. 나는 그런 동행에 얽매이지 않으며, 나이가 들어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방식이 생기고 일반적인 형태에서 어느 정도 격리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당신은 타인을 위해 고통받거나 타인이 당신을 위해 고통받게 된다. 둘 다 불편한 일이지만, 후자가 나에게는 훨씬 더 가혹하게 느껴진다. 확고한 지성을 갖추고 당신과 기질이 잘 맞으며 당신을 기꺼이 따르는 정직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은 드문 행운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이다. 나는 모든 여행에서 그런 동행이 몹시 그리웠다. 하지만 그런 동행은 집에서부터 미리 선택하고 맺어두어야 한다. 소통 없이는 어떤 즐거움도 내게 맛을 주지 못한다. 내 영혼에 즐거운 생각이 떠올라도 혼자 품고 나눌 사람이 없으면 그 사실이 나를 괴롭힌다. "만약 지혜를 간직하기만 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조건으로 지혜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하리라." 다른 이는 이것을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현자에게 모든 것이 풍족하여 최고의 한가함 속에서 인지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홀로 숙고하고 관조할 수 있는 삶이 허락된다 하더라도, 만약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지독한 고독 속에 있다면 그는 삶을 떠나야 하리라." 아르키타스의 견해는 내 마음에 든다. 하늘에서조차 동료의 도움 없이 거대하고 신성한 천체들 사이를 거니는 것은 불쾌한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지루하고 어리석은 동행과 함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가 되는 편이 낫다. 아리스티포스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처럼 사는 것을 좋아했다.
운명이 나의 뜻대로 삶을 영위하도록 허락한다면,
나는 안장 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 세월을 보내는 삶을 택하리라.
타오르는 불꽃이 어디에서 날뛰는지, 안개와 비 내리는 이슬은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보고 싶으니.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편안한 소일거리가 없단 말인가? 무엇이 부족한가? 당신의 집은 공기가 맑고 건강하며, 충분히 갖춰져 있고, 그 이상으로 넉넉하지 않은가? 국왕의 위엄이 그곳에서 여러 번 화려하게 머물다 가지 않았는가? 당신의 가문은 질서 정연하여 그들보다 못한 자들보다 더 뛰어난 위상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마음을 갉아먹는, 특별하고 소화할 수 없는 고질적인 고민이라도 있는 것인가?
지금 가슴속에 박혀 당신을 태우고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에 가면 아무런 방해나 번거로움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운명은 결코 온전히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그러니 잘 보라, 당신을 방해하는 것은 당신 자신뿐이다. 당신은 어디를 가든 자기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고, 어디에서든 불평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 아래에는 짐승 같은 영혼이나 신적인 영혼을 가진 이들 외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절한 상황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가 도대체 어디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겠는가? 당신과 같은 처지를 자신의 소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저 당신 자신을 바꾸어라.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해서는 오직 인내할 권리밖에 없지만 말이다. '이성으로 다스려진 평온함이 아니라면, 그 어떤 평온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조언의 이유를 보며,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저 '현명해져라'라고 한마디 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적절했을 것이다. 그런 결심은 지혜를 넘어서는 것이며, 오히려 지혜가 낳은 결과이자 산물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시름시름 앓는 가련한 환자에게 억지로 기운을 내라고 소리치는 것도 이와 같다. 그가 '건강해져라'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덜 무모한 조언일 것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라', 즉 '이성을 따르라'는 말은 확실하고 이해하기 쉬운 유익한 가르침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현자들에게나 나에게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대중적인 격언이지만, 그 의미는 엄청나게 넓다. 도대체 무엇을 포함하지 않겠는가? 세상의 모든 것은 판단과 변화에 달려 있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여행의 즐거움은 불안과 결단력 부족의 증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주된 성질이자 지배적인 자질이기도 하다. 그렇다, 인정한다. 나는 꿈이나 소망 속에서조차 내가 머물 수 있는 그 무엇도 보지 못한다. 다양함이야말로 나를 만족시키고, 다양함을 소유하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적어도 무언가가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여행을 하면서도 나는 별다른 미련 없이 멈출 수 있고, 어디든 편안하게 즐길 거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지탱해준다. 내가 사적인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공적인 삶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삶 또한 어쩌면 내 기질에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군주를 더 즐겁게 섬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특별한 의무 때문이 아니라 내 판단과 이성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당파에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미움을 받아서 그곳으로 쫓겨난 것도 아니며 강요받은 것도 아니다. 나머지 일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필연이 내게 강요하는 것은 무엇이든 싫어한다. 오직 그것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편안함이라도 내 목을 죄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 노는 물을 젓고, 다른 노는 모래를 긁어내게 하라.
한 가지 끈만으로는 결코 나를 붙잡아둘 수 없다. 당신은 이런 유희에 허영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 허영이 없겠는가? 그 아름다운 가르침들도 허영이며, 모든 지혜는 허영일 뿐이다. "주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이 헛됨을 아시느니라." 이런 정교한 미묘함은 설교에나 어울린다. 그것은 우리를 짐을 가득 실은 채 저세상으로 보내려는 담론일 뿐이다. 삶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움직임이며, 그 본질상 불완전하고 무절제한 행동이다. 나는 삶을 있는 그대로 섬기려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감내하노라.
"자연의 보편적 법칙에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우리 고유의 본성을 따라야 한다."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인간이라면 누구도 안주할 수 없는 철학의 고매한 논점들과 우리의 관습과 역량을 벗어나는 이 규율들이란 말인가? 나는 사람들이 종종 우리에게 삶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을 제시하는 자나 듣는 자나 그것을 따를 희망도 없거니와 심지어 따를 마음조차 없다. 간통범에게 내릴 유죄 판결문을 적던 바로 그 종이에서 판사는 한 조각을 떼어내어 동료의 아내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쓴다. 당신이 방금 불륜을 저지른 그 여인은, 곧이어 당신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동료가 저지른 똑같은 잘못을 포르키아보다도 더 격렬하게 비난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죄라고 생각지도 않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내 젊은 시절, 나는 한 멋쟁이가 한 손으로는 아름다우면서도 방탕한 훌륭한 시를 대중에게 내놓고, 다른 손으로는 세상이 오래전에 질려버린 가장 까다로운 신학적 개혁론을 동시에 내미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는 법과 규율이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 자신은 다른 길을 걷는다. 단지 도덕적 타락 때문만이 아니라, 종종 생각과 판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 담론을 읽어보라. 그 창의성과 유창함, 적절함이 즉각 당신의 정신을 치고 감동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양심을 간지럽히거나 찌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작 말을 건네는 대상이 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리스톤은 목욕탕이나 교훈이나, 씻어내고 때를 벗겨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껍질에 머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골수를 빼낸 뒤의 일이다. 아름다운 잔에 담긴 좋은 와인을 마신 뒤에야 우리가 그 잔의 조각과 세공을 살펴보는 것과 같다. 고대 철학의 모든 분파에서, 같은 저자가 절제의 규칙을 출판하면서 동시에 사랑과 방탕에 관한 글을 펴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크세노폰은 클리니아스의 품 안에서 아리스티포스의 덕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그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적적인 개종을 겪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솔론은 때로는 자기 자신으로, 때로는 입법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때로는 대중을 위해, 때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말한다. 그리고 그는 확고하고 온전한 건강을 확신하며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규칙을 자신을 위해 취한다.
의심스러운 환자들은 더 훌륭한 의사에게 치료받게 하라.
안티스테네스는 현자가 사랑하고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현자는 법보다 더 나은 판단과 덕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의 동요에는 이성으로, 운명에는 자신감으로, 법에는 자연으로 맞서라.' 소화력이 약한 위장에는 강제적이고 인위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튼튼한 위장은 자연스러운 식욕이 처방하는 대로 따를 뿐이다. 우리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환자에게는 시럽과 죽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멜론을 먹고 시원한 포도주를 마신다. 창녀 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읽는 책이 무엇인지, 그들의 지혜나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자들은 다른 누구 못지않게 자주 내 문을 두드린다.' 우리의 방종함은 항상 허용되고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기에, 우리는 종종 보편적 이성을 넘어 우리 삶의 계율과 법을 지나치게 옥죄어 왔다.
그 누구도 당신이 허용하는 만큼만 잘못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령과 복종 사이에 더 많은 균형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는 불공정해 보이기 마련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법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일생에 열 번은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심지어 그런 사람을 처벌하고 잃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지극히 불공정한 일일 것이다.
이보게, 저 남자나 저 여자가 자기 살가죽을 어떻게 하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가?
법을 전혀 어기지 않으면서도 미덕을 지닌 사람이라는 칭찬은 전혀 받을 자격이 없고, 철학이라면 아주 당연히 매질을 가할 만한 자가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법과 미덕의 관계는 혼란스럽고 불균형하다. 우리는 신의 뜻에 따라 선한 사람이 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서도 그리될 수 없다. 인간의 지혜는 스스로 부과한 의무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만약 도달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의무를 저 멀리에 설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열망하고 추구했을 것이다. 우리의 상태는 이토록 일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은 스스로 필연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도록 자신을 몰아세운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존재라는 이유로 자신의 의무를 설정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그는 아무도 실천하지 못할 일을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인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불의한 것인가? 우리를 할 수 없는 것으로 단죄하는 법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단죄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행동은 한 가지로 하고 말은 다른 식으로 하는 이런 기이한 자유는 말하는 자들에게나 허용될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자기 자신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나는 발걸음과 붓끝이 일치해야 한다. 평범한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카토의 미덕은 그 시대의 이성을 넘어서는 활력이 있었다. 공동의 봉사를 위해 타인을 다스리는 일에 관여했던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의하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헛되고 시대를 앞서간 정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간의 관습과 거의 차이가 없는 내 도덕조차도 나이가 듦에 따라 나를 다소 고립시키고 어울리기 힘든 사람으로 만든다. 내가 어울리는 세상에 대해 아무 이유 없이 혐오감을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세상을 싫어하는데 세상이 나를 싫어한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무런 이유가 없는 짓임을 잘 안다. 세상일에 배정된 미덕이란 인간의 나약함에 맞추고 결합하기 위해 여러 겹으로 접히고, 구석지고, 굽어 있는 미덕이다. 그것은 혼합되고 인위적이며, 결코 올곧거나, 명료하거나, 한결같거나, 순수하게 결백한 것이 아니다. 연대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왕 중 한 사람이 고해 신부의 양심적인 설득에 너무나 단순하게 휘둘렸다고 비난한다. 국가의 일에는 그보다 더 대담한 계율이 필요한 법이다.
궁정을 떠나라, 경건하고자 하는 자여.
나는 예전에 내 안에서 생겨났거나 교육을 통해 얻은, 그래서 내가 사생활에서 아주 편리하게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안전하게는 써먹고 있는 거칠고 생경하며 투박하고 순수한 삶의 견해와 규칙들을 공적인 업무에 사용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그런 미숙한 미덕은 공적인 업무에서 부적절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자는 상황에 따라 몸을 비스듬히 하거나, 팔꿈치를 움츠리거나, 물러서거나 나아가야 하며, 심지어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야 할 때도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따르기보다는 타인에 따라 살아야 한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가 아니라 남이 의도하는 대로, 시대와 사람, 그리고 상황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세상일이라는 혼란 속에서 아무런 탈 없이 빠져나오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철학자를 통치자로 세울 때, 그것은 아테네처럼 타락한 정체, 하물며 우리 시대의 정체처럼 지혜마저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좋은 풀이라도 자신의 본래 조건과 아주 다른 토양에 옮겨 심으면, 그 토양이 풀에 맞춰 변하기보다는 풀이 토양에 더 빨리 적응해버리고 만다. 내가 만약 그런 직무에 완전히 몸을 담가야 한다면, 나 자신을 크게 바꾸고 고쳐야 할 것임을 느낀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나를 그렇게 바꿀 수 있겠지만, 어째서 그렇게 할 수 없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이 직무를 조금이나마 경험해보았을 때, 나는 그만큼 이 일에 진저리가 났다. 내 영혼 속에서 때때로 야망을 향한 유혹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지만, 나는 그 반대 방향으로 온 힘을 다해 버티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니 너 카툴루스여, 꿋꿋하게 견디어라.
사람들은 나를 공적인 업무에 거의 부르지 않으며, 나 또한 거의 나서지 않는다. 내 주된 자질인 자유와 한가는 바로 그런 업무와는 정반대에 있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능력을 구분하는 법을 잘 모른다. 그 능력에는 선택하기 어렵고 미묘한 구분과 한계가 있다. 개인적인 삶에서의 유능함으로 공적인 업무에서의 유능함을 결론짓는 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스스로는 잘 다스리면서도 타인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에세이는 써도 실질적인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포위전은 잘 이끌어도 전투는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며, 사석에서는 잘 말해도 대중이나 군주 앞에서는 연설을 잘 못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오히려 한 가지를 할 수 있는 자가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능력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높은 지성을 가진 자들이 낮은 지성을 가진 자들보다 낮은 일에 더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부족 투표를 집계하여 의회에 보고할 줄 몰랐다는 이유로 아테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가? 물론 내가 그 인물의 완벽함을 존경하는 마음은, 그의 운명이 내 주요한 불완전함을 변명하기 위한 이토록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주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능력은 자잘한 조각으로 나뉘어 있다. 내 능력은 폭도 넓지 않고 가짓수도 빈약하다. 사투르니누스는 자신에게 모든 지휘권을 맡긴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이여, 그대들은 유능한 대장 하나를 잃고 형편없는 군 총사령관 하나를 얻었소." 요즘처럼 병든 시대에 순수하고 진실한 미덕을 세상에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자는, 세상의 풍조와 함께 견해가 타락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거나(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묘사하는지 들어보라, 대다수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고 규범을 만드는 것을 들어보라. 그들은 미덕을 묘사하는 대신 온전히 불의와 악만을 묘사하며, 그것을 군주의 교육을 위한 것처럼 거짓되게 제시한다), 혹은 알면서도 잘못 호언장담하는 것이며,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의 양심이 비난할 일을 수천 가지나 저지르는 셈이다. 나는 세네카가 같은 상황에서 겪었던 경험에 대해 그가 진심으로 내게 말해준다면 기꺼이 믿을 것이다. 그런 필연성 속에서 가장 명예로운 선함의 표시는 자신의 잘못과 타인의 잘못을 자유롭게 인정하는 것, 그리고 악으로 향하는 경향을 자신의 힘으로 지지하고 지연시키는 것, 마지못해 그 경향을 따르면서도 더 나은 희망을 품고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빠져 있는 프랑스의 이런 해체와 분열 속에서, 저마다 자신의 대의를 방어하려 애쓰는 것을 본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자들조차도 위장과 거짓을 일삼고 있다. 이를 솔직하게 기록한다면 무모하고 부도덕하게 보일 것이다. 가장 정의로운 진영이라 할지라도 결국 썩고 벌레 먹은 몸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몸이라도 덜 아픈 부분이 건강하다고 불리며, 우리의 자질이란 비교 속에서만 가치를 지니기에 그것은 타당하다. 시민적 결백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크세노폰이 아게실라오스를 칭송한 대목을 보는 것이 무척 좋다. 한때 적대 관계였던 이웃 군주가 자신의 영토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이를 허락하여 펠로폰네소스를 가로질러 지나가게 해주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음에도 그를 투옥하거나 독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속에 따라 그를 정중히 맞이하고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지금의 그런 기질을 가진 자들에게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는 그러한 행동의 솔직함과 관대함이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헛똑똑이들은 그것을 비웃었을 것이다. 스파르타의 결백은 프랑스의 결백과 이토록 다르다. 우리에게도 덕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만약 자신의 시대보다 더 엄격한 규범을 세운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규칙을 굽히고 무디게 하거나, 아니면 내가 권하건대 아예 구석으로 물러나 우리와 섞이지 않는 것이 낫다. 거기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만약 내가 뛰어나고 경건한 사람을 본다면, 나는 그를 몸이 둘인 기괴한 아이나, 쟁기질하다 발견된 놀라운 물고기, 혹은 새끼를 밴 노새에 비유하리라.
우리는 더 좋은 시대를 그리워할 수는 있지만, 현재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다른 행정관들을 바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의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어쩌면 선한 이들보다 악한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더 권장될지도 모른다. 이 군주국의 승인된 옛 법의 모습이 구석 어딘가에라도 빛나고 있다면, 나는 그곳에 머물 것이다. 만약 그 법들이 불행히도 서로 모순되어 방해하고, 두 개의 선택지로 갈라져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의심스럽고 어렵게 만든다면, 나는 기꺼이 그 폭풍으로부터 탈출하여 몸을 숨기는 쪽을 택할 것이다. 자연이 그동안 나를 도울 수도 있을 것이고, 전쟁이라는 우연이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서라면 나는 솔직하게 내 입장을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나타난 세 명의 도둑들 사이에서는 숨어 있거나 아니면 그 바람에 몸을 맡겨야 했을 것이다. 나는 이성이 더 이상 인도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로 빗나가려 하는가?
이런 잡동사니 같은 글은 내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나는 곁길로 새곤 하는데, 이는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분방함 때문이다. 내 상념들은 서로 이어져 있지만, 때로는 아주 멀리 떨어져서 비스듬히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나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훑어본 적이 있는데, 앞부분은 사랑을 다루고 뒷부분은 수사학을 다루는 식의 기묘한 뒤섞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런 변화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바람에 몸을 맡기듯(혹은 그렇게 보이듯) 글을 쓰는 놀라운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내 장의 이름들이 반드시 그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안드리아」, 「에우누쿠스」, 혹은 「술라」, 「키케로」, 「토르콰투스」 같은 다른 이들의 예처럼 그저 어떤 표시로 내용을 나타낼 뿐이다. 나는 껑충껑충 뛰고 재주를 부리는 시적인 걸음걸이를 좋아한다. 플라톤이 말했듯, 그것은 가볍고 변덕스러우며 신들린 기술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저작 중에는 자신의 주제를 잊어버리고, 논쟁의 본래 목적은 단지 우연히 등장할 뿐 외적인 내용 속에 완전히 묻혀버리는 것들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에서 그가 보여주는 방식을 보라. 오 신이여, 이런 대담한 일탈과 변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이 무심하고 우연한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아름답다. 내 주제를 놓치는 것은 부주의한 독자이지, 내가 아니다. 구석 어딘가에는 글이 압축되어 있더라도 충분히 의미가 통하는 단어가 항상 있을 것이다. 나는 무분별하고 소란스럽게 주제를 바꾸며, 내 문체와 정신 또한 그처럼 방랑한다. 우리 스승들의 가르침과 그보다 더 많은 예시가 말해주듯, 더 큰 어리석음을 피하고 싶다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다. 수많은 시인은 산문적인 글쓰기 속에서 질질 끌며 시들어가지만, 내가 이곳에 섞어놓은 가장 훌륭한 고대 산문들은 시적 활력과 대담함으로 빛나며 그 광기의 기운을 일부 보여준다. 확실히 말솜씨에 있어서는 산문이 시에게 주도권과 우위를 내주어야 한다. 플라톤은 시인이 뮤즈의 삼각대 위에 앉아 마치 분수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곰곰이 생각하거나 따져보지도 않은 채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광기 어린 분출로 쏟아낸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에게서 다채롭고 상반된 본질을 가진, 맥락이 끊어진 내용들이 흘러나오게 된다. 학자들은 고대 신학이 전부 시이며, 그것이 최초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신들의 원래 언어인 것이다. 나는 내용이 스스로를 분별하게 두려 한다. 내용은 스스로 어디서 바뀌고, 어디서 결론을 맺으며,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다시 이어지는지를 충분히 보여준다. 약하거나 무심한 독자들을 위해 덧붙인 말이나 연결어, 그리고 짜임새를 얽어 넣지 않고, 나 자신에게 주석을 달지도 않는다. 잠결에 읽히거나 대충 훑어보며 읽히느니 차라리 읽히지 않는 편을 택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대충 읽는 것으로는 어떤 유익도 얻을 수 없다." 만약 책을 집어 드는 것이 배우는 것이고, 책을 보는 것이 관찰하는 것이며, 책을 훑어보는 것이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라면, 내가 나 자신을 이토록 무지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독자의 주의를 내용의 무게로 사로잡을 수 없다면, 내 글의 복잡함으로라도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 독자는 나중에 시간을 낭비했다고 후회할 것이다.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그 시간 동안 빠져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이해하기를 경멸하는 그런 성미를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오히려 나를 더 높게 평가할 것이며, 그 불명확함을 보고 내 의미가 깊다고 단정할 것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런 불명확함을 무척 싫어하며, 내가 나 자신을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딘가에서 자신이 일부러 불명확하게 글을 썼다고 자랑한다. 이는 악의적인 허세일 뿐이다. 처음에 내가 사용했던 아주 잦은 장 분할은 독자의 주의가 생기기도 전에 끊어버리고 흐트러뜨리는 것 같았다. 그런 짧은 글에는 독자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몰입하기가 어려웠기에, 나는 장을 더 길게 쓰기로 했고, 이는 주제에 대한 제시와 시간을 들여 읽을 것을 요구한다. 그런 작업에는 한 시간조차 내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서는 안 된다. 다른 일을 하면서 곁다리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어쩌면 나에게는 절반만 말하고, 혼란스럽게 말하며, 불협화음을 내며 말해야 할 어떤 특별한 의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흥을 깨는 이성이라는 놈이 밉다. 인생을 괴롭히는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들이나, 그토록 정교한 의견들이 진실을 담고 있다 한들, 나는 그것이 너무 비싸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나는 허영심이나 어리석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그리고 내 자연스러운 성향을 너무 꼼꼼하게 검열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 둔다. 나는 다른 곳에서 폐허가 된 집과 조각상들, 그리고 하늘과 땅을 보았지만, 어디를 가나 결국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토록 거대하고 강력했던 그 도시의 무덤을 보고 또 보아도 감탄하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이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도리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바로 이 죽은 이들과 함께 자라왔다. 나는 내 집안의 일보다 훨씬 전부터 로마의 일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루브르 궁을 알기 전에 이미 카피톨리움 언덕의 배치를 알았고, 센강보다 티베르강을 먼저 알았다. 나는 우리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루쿨루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처지와 운명을 머릿속에 더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먼 옛날의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도 그들만큼이나 완벽하게 떠나갔다. 아버지는 18년 동안이나 그들이 1,600년 동안 겪은 것만큼이나 멀리 나와 삶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의 기억과 우정과 교제를 아주 완전하고 생생한 결합으로 붙들고 실천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내 성미상 나는 죽은 이들에게 더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도울 수 없기에, 내 보기에는 내 도움을 더욱 필요로 하는 듯하다. 그 점에서 감사는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 주고받는 보답이 오가는 상황에서는 선행의 가치가 그만큼 덜하기 때문이다. 아르케실라오스는 병든 크테시비우스를 방문하여 그가 궁핍한 처지에 있는 것을 보고는, 몰래 침대 베개 밑에 줄 돈을 밀어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그 사실을 숨김으로써, 그가 고마워할 의무조차 면해준 셈이 되었다. 내게 우정과 감사의 빚을 진 이들은 죽었다고 해서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부재하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는 더욱 정성스럽게 그들에게 보답했다. 나는 친구들이 내가 하는 말을 들을 방법이 없을 때 그들에 대해 더 애정 어린 말을 한다. 나는 폼페이우스를 변호하고 브루투스의 대의를 위해 백 번도 넘게 다투었다. 그런 인연은 우리 사이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현재의 사물조차도 우리는 상상 속에서만 붙들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시대에 쓸모없는 존재임을 느끼며 저 시대로 자신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나는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번영했던 그 옛 로마의 상태에 푹 빠져 있어서, 그 태동기도 노쇠기도 아닌 그 절정의 모습에 매료되고 열광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거리와 집터, 그리고 지구 반대편까지 닿아 있는 그 깊은 폐허를 보고 또 보아도 지루할 줄을 모른다. 명성이 높은 이들이 살았거나 거닐었다고 알려진 장소를 보는 것이, 그들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글을 읽는 것보다 왜 우리를 더 크게 움직이는가? 그것은 자연의 이치인가, 아니면 상상의 착각인가? "장소가 주는 교훈의 힘은 참으로 크구나! 로마라는 도시에서는 그런 일이 끝도 없으니, 우리가 발을 내딛는 곳마다 어떤 역사의 흔적을 밟게 된다." 나는 그들의 얼굴과 자태, 그리고 의복을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나는 이 위대한 이름들을 입안에서 곱씹으며 내 귓가에 울리게 한다. "나는 그들을 경배하며, 그토록 위대한 이름들 앞에 늘 일어선다." 어떤 부분에서든 위대하고 경이로운 것들은 그것의 평범한 부분들까지도 나는 경탄한다. 나는 그들이 담소를 나누고, 거닐고,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을 기꺼이 보고 싶다. 내가 살아서 죽는 것을 보았던, 그토록 많은 정직하고 용맹한 사람들의 유물과 모습을 경멸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따를 줄만 안다면 그들의 본보기로 우리에게 많은 훌륭한 가르침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로마 그 자체가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명분으로 우리 왕관과 동맹을 맺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고 보편적인 공통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곳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는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인정받으니, 그곳은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의 대도시이다. 에스파냐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누구든 그곳에서는 자기 집처럼 편안하다. 이 국가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어디에 있든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원이기만 하면 된다. 하늘이 이토록 은총의 영향력과 일관성으로 감싸 안은 곳은 지상에 없다. 그 폐허조차도 영광스럽고 당당하다.
「찬양할 만한 폐허보다 더 귀중한 것.」
로마는 여전히 무덤 속에서도 제국의 흔적과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이로써 자연의 창조물은 한곳에 모여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토록 헛된 즐거움에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기질이 유쾌하다면 그것이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다. 상식 있는 사람을 꾸준히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비난할 마음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친 일을 내게 벌이지 않은 운명에 큰 빚을 졌다. 운명이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 이들을 내버려 두는 것은 혹시 그들의 방식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