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서기 121년 4월 26일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M. 안니우스 베루스였으며, 로마의 제2대 왕 누마의 후손을 자처하는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다. 이로써 가장 신실한 황제는 초기 로마의 가장 경건한 왕의 혈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안니우스 베루스는 로마에서 고위 관직을 지냈고, 같은 이름의 할아버지는 세 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했다. 부모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마르쿠스는 그들을 사랑으로 기억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르쿠스는 집정관 출신인 할아버지 안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고, 둘 사이에는 깊은 애정이 있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저서 첫 페이지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온화하고 겸손한 태도를 배웠으며, 분노와 격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웠다고 감사히 밝히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소년의 훌륭한 성품을 꿰뚫어 보고, 그를 베루스가 아니라 그 이름보다 더 진실하다는 뜻의 '베리시무스'라고 불렀다. 황제는 마르쿠스가 여섯 살 때 기사 계급으로 올렸고, 여덟 살 때는 고대 살리 사제단의 일원으로 삼았다. 소년의 고모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는 후에 황제가 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결혼했다. 그런 연유로 아들이 없던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를 입양하여 우리가 아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켰다. 그의 교육은 세심한 주의 속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유능한 스승들이 그를 위해 초빙되었고, 그는 그가 크게 즐거워했던 스토아학파의 엄격한 교리를 배웠다. 그는 소박하게 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며 모든 나태함과 사치를 피하도록 배웠다. 그의 신체는 레슬링, 사냥, 야외 활동으로 단련되었고, 비록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가장 사나운 멧돼지를 마주할 만큼 대담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는 당시의 방탕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로마에서 가장 큰 소란은 서커스 경기장에서 이른바 '파벌' 간의 다툼이었다. 경주용 전차 기수들은 빨강, 파랑, 하양, 초록 중 하나의 색을 채택했고, 그들을 지지하는 파당들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열정으로 서로를 응원했다. 경주 전차들의 행렬 뒤에는 폭동과 부패가 따랐으나, 마르쿠스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140년에 마르쿠스는 집정관에 올랐고, 145년에는 약혼이 결혼으로 결실을 보았다. 2년 뒤 파우스티나는 그에게 딸을 낳아주었으며, 그 직후 호민관 직위와 다른 제국의 명예로운 직책들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161년에 사망하자 마르쿠스가 황제의 지위를 승계했다. 그는 즉시 안토니누스가 마르쿠스와 동시에 양자로 삼아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라는 이름을 주었던 L.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올렸다. 이제 두 사람은 제국의 동료가 되었고, 연하인 베루스는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마르쿠스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사방에서 전쟁이 터졌다. 동방에서는 파르티아의 볼로가에수스 3세가 로마 군단 하나를 전멸시키고 시리아를 침공하며 오랫동안 준비해온 반란을 일으켰다(162년). 베루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급히 파견되었으나, 전쟁을 부하 장수들에게 맡겨둔 채 술과 방탕에 빠짐으로써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쿠스는 북부 국경 지대에서 여러 강력한 부족이 연합하는 더 심각한 국내 위기에 직면했다. 그들 중 우두머리는 마르코만니족, 콰디족(이 책에서 언급됨), 사르마티아족, 카티족, 야지게스족이었다. 로마 본국에서는 전염병과 기근이 닥쳤는데, 전염병은 베루스의 군단이 동방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기근은 홍수로 인해 엄청난 양의 곡물이 파괴된 탓이었다. 기근을 완화하고 긴급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한 뒤―마르쿠스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황실 보석까지 팔아야 했다―두 황제는 마르쿠스의 통치 기간 내내 어느 정도 이어질 투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 전쟁이 한창이던 169년에 베루스가 사망했다. 우리는 그 원정의 세부적인 과정을 알 방법은 없으나, 결국 로마인들이 야만 부족들을 분쇄하고 제국을 더욱 안전하게 만드는 정착을 이루어냈다는 점은 확실하다. 마르쿠스 본인이 총사령관이었으며, 승리는 그의 능력과 더불어 페르티낙스의 사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부관 선택의 지혜 덕분이었다. 이 원정 중에는 몇 차례의 중요한 전투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제12번 '번개' 군단의 전설로 유명해졌다. 174년 콰디족과의 전투에서 전세가 적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으나, 갑자기 거센 천둥과 비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자 번개가 야만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어 그들이 패주하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폭풍이 많은 기독교도를 포함한 군단의 기도를 들어주어 일어난 것이라 말했고, 그 이유로 '제12번 '번개' 군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제12번 '번개' 군단'이라는 명칭은 더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기에 이 이야기의 이 부분만큼은 사실일 수 없다. 하지만 폭풍의 도움은 이 전쟁들을 기념하는 로마의 안토니누스 원주에 새겨진 장면 중 하나를 통해 인정받고 있다.
이런 소란 끝에 이루어진 합의는 동방에서 예상치 못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유능한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당시 동방 속주들의 총독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당시 건강이 쇠약했던 마르쿠스가 죽으면 즉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시우스는 계획대로 행동했다. 마르쿠스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화평을 맺고 이 새로운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귀환했다. 황제의 가장 큰 슬픔은 내전의 참혹함에 휘말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카시우스의 자질을 칭찬하며, 자신이 기꺼이 용서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카시우스가 스스로 해를 입히는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 어린 소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가 동방에 도착하기 전에 카시우스는 황제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떠났으며 결국 그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동방으로 향했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암살자들은 카시우스의 머리를 그에게 가져왔으나, 황제는 그 선물을 분개하며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알현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 여정 중에 그의 아내 파우스티나가 사망했다. 귀환한 황제는 개선식을 거행했다(176년). 곧이어 그는 독일로 향해 다시금 전쟁의 짐을 짊어졌다. 그의 작전은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으나, 최근 몇 년간의 고난은 평소에도 튼튼하지 못했던 그의 체력에 너무나 큰 부담이 되었고, 결국 180년 3월 17일 판노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한 황제라고 해서 가정의 불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파우스티나는 그에게 몇 명의 아이를 낳아주었고, 그는 자녀들을 끔찍이 아꼈다. 그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은 여전히 여러 조각 전시실에서 볼 수 있으며, 아버지의 몽환적인 표정을 기묘한 느낌으로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자녀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고, 마르쿠스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살아남은 아들은 오직 하나, 나약하고 무능한 콤모두스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뒤를 이은 콤모두스는 성급하고 어리석은 평화 협정으로 수많은 전투의 성과를 수포로 돌렸으며, 그의 12년 통치는 그가 얼마나 잔혹하고 피에 굶주린 폭군이었는지를 증명했다. 파우스티나 본인의 이름은 스캔들에 자유롭지 못해, 그녀는 정조를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카시우스와 모의하여 그를 치명적인 반란으로 부추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혐의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어쨌든 황제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단 한 번도 의심의 여지를 느끼지 않았다.
군인으로서 마르쿠스는 유능하고 성공적이었으며, 행정가로서 그는 신중하고 성실했다. 철학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해 있었음에도 그는 미리 구상한 계획에 따라 세상을 재편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전임자들이 닦아놓은 길을 걸으며, 오직 자신의 의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부패를 막는 데 힘썼다. 그가 현명하지 못한 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베루스와 그랬던 것처럼 제국에 동료 황제를 둔 것은 둘 중 하나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어려운 위험한 혁신이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바로 이 선례가 로마 제국을 양분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지나친 중앙 집권화로 민정에서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은 사법 행정이었다. 마르쿠스는 법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노예의 처지를 덜 고단하게 만들며, 고아들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고자 했다. 빈민 아동을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해 자선 재단이 설립되었다. 속주들은 압제로부터 보호받았고, 재난을 당한 도시나 지역에는 공적인 지원이 제공되었다. 그의 이름에 남은 가장 큰 오점이자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기독교도들에 대한 처우이다. 그의 통치 기간에 로마에서는 유스티누스가 신앙의 순교자가 되었고 스미르나에서는 폴리카르포스가 순교했으며, 속주 곳곳에서 광신적인 사건들이 터져 나와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학 행위에 대해 그가 전혀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은 핑계가 될 수 없다. 그것을 아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만약 몰랐다면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누구보다 먼저 인정했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를 언급하는 그의 태도를 볼 때, 그가 그들에 대해 오직 중상모략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며, 그들이 공정한 심문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어떠한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 점에서는 트라야누스가 그보다 나았다.
사려 깊은 정신에게 로마의 종교는 별다른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의 전설들은 종종 유치하거나 불가능한 이야기였고, 그 가르침은 도덕성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사실 로마의 종교는 일종의 거래와 같아서, 사람들이 특정한 희생제와 의식을 치르면 신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은총을 베풀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경건한 영혼들은 그리스에서 그러했듯이(비록 정도는 덜했지만) 철학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제국 시절에는 사실상 그 영역을 양분하던 두 경쟁 학파가 있었으니, 바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였다. 각 학파가 제시한 이상은 명목상 거의 같았다. 스토아학파는 모든 감정을 억제하는 '아파테이아(ἁπάθεια)'를 갈망했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모든 소란에서 자유로운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를 추구했다. 하지만 결국 한쪽은 완고한 인내의 대명사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방종한 자유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에피쿠로스학파를 다룰 필요는 없지만, 스토아학파의 역사와 교리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은 키프로스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대략 기원전 350년부터 250년 사이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키프로스는 태고부터 동양과 서양의 만남의 장소였고, 그에게 페니키아인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을 중요하게 볼 수는 없겠지만(페니키아인들은 철학자가 아니었으므로), 그가 소아시아를 통해 극동 지방과 접촉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는 견유학파의 크라테스 밑에서 공부했지만 다른 철학 체계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수년간의 공부 끝에 그는 아테네의 주랑에서 자신의 학파를 열었는데, 이곳은 '채색된 주랑' 즉 '스토아'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스토아학파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제논 다음으로 스토아학파가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인물은 스토아 철학을 체계화한 크리시포스(기원전 280~207년)이다. 그에 대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크리시포스가 없었다면, 스토아학파도 없었으리라.'
스토아학파는 사유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으며, 그 목적이란 제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관되게 사는 것(ὁμολογουμένος ζῆν)'이었고, 훗날 설명되었듯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ὁμολογουμένος τῇ φύσει ζῆν)'이었다. 삶을 자연에 순응시키는 이러한 태도가 바로 스토아학파의 덕(德)에 대한 관념이었다. 이 격언은 자칫 덕이란 각각의 자연적 충동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오해될 수 있지만, 이는 스토아학파의 본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자연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철학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우주와 그 법칙, 신의 통치와 목적론적 문제를 다루는 '물리학', 참과 거짓을 구별하도록 정신을 훈련하는 '논리학', 그리고 이렇게 얻고 검증된 지식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윤리학'이 그것이다.
스토아학파의 물리학 체계는 범신론적 요소가 가미된 유물론이었다. 현상의 이데아 혹은 원형만이 실재한다는 플라톤의 견해와는 반대로, 스토아학파는 물질적 대상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물질적 우주 안에는 그 물질을 통해 작용하며 불, 에테르, 정신, 영혼, 이성, 지배 원리 등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영적인 힘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주는 신이며, 대중적인 신들은 그 신의 발현이다. 한편 전설과 신화는 알레고리일 뿐이다. 인간의 영혼은 신성에서 흘러나온 것이며, 결국 다시 신성 속으로 재흡수될 것이다. 신적인 지배 원리는 모든 사물이 선을 향해, 곧 전체의 선을 위해 함께 작동하도록 만든다. 인간의 최고선은 공공의 선을 위해 신과 더불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스토아학파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했던 의미이다. 개인에게 있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덕뿐이다. 섭리가 우주를 다스리듯, 영혼 안의 덕이 인간을 다스려야 한다.
논리학에서 스토아학파의 체계는 진리의 검증 기준인 '판단 기준(Criterion)'에 관한 이론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갓 태어난 영혼을 글을 쓸 준비가 된 종이 한 장에 비유했다. 감각은 이 종이 위에 인상(φαντασίαι)을 새기며, 영혼은 이 인상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무의식중에 일반 개념(κοιναὶ ἔννοιαι)이나 예기(προλήψεις)를 형성한다. 어떤 인상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할 때, 그들은 그것을 '확고하게 붙잡는 인상(καταληπτικὴ φαντασία)'이라 불렀고, 그들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는 진리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연역법이나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관념과 추론들은 이러한 '붙잡는 인상'을 통해 검증되었다. 윤리적 적용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최고의 선은 덕 있는 삶이었다. 오직 덕만이 행복이며, 악덕은 불행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이론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덕과 악덕 사이에는 어떠한 단계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물론 각각의 덕과 악덕은 특수한 발현 양상을 띤다. 게다가 덕 이외에는 좋은 것이 없고, 악덕 이외에는 나쁜 것이 없다. 건강과 질병, 부와 빈곤, 쾌락과 고통처럼 흔히 좋거나 나쁘다고 불리는 외적인 것들은 그들에게 있어 '무차별한 것(ἀδιάφορα)'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덕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에 불과하다. 이상적인 현자는 만사에 스스로 충분하며(αὐταρκής), 이러한 진리를 알기에 그는 고문대 위에 누워 있을 때조차 행복할 것이다. 스토아학파 중 그 누구도 스스로를 그러한 현자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각자는 마치 기독교도가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듯 그러한 이상을 향해 정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너무나 명백한 과장이 있었기에, 후대의 스토아학파들은 무차별한 것들을 다시 '선호할 만한 것(προηγμένα)'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ἀποπροηγμένα)'으로 세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완전한 지혜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적절한 행위(καθήκοντα)'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것들은 덕 있는 것도 악덕인 것도 아니며, 무차별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 중간의 위치를 차지했다.
스토아학파의 체계에서 두 가지 점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달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세심한 구분이다. 욕구와 혐오, 의견과 애정은 의지의 권한 안에 있는 반면, 건강이나 부, 명예 등과 같은 것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 스토아학파는 우주가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되고 다스려지듯, 자신의 욕구와 애정을 통제하고 의견을 인도하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의지 혹은 지배 원리의 영향력 아래 두도록 요구받았다. 이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 덕목인 '절제(σωφροσύνη)'를 특별하게 적용한 것이며, 기독교 윤리에서도 그와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점은 우주의 통일성과 거대한 전체의 일부로서 인간이 지닌 의무에 대한 강력한 강조이다. 공공심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정치적 덕목이었으며, 여기서는 세계 시민주의로 승화되었다. 기독교 성인들 또한 같은 것을 강조했다는 점은 다시 한번 음미할 가치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인이나 히브리인, 노예나 자유인 구분 없이 전 세계적인 형제애의 일원이며, 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삶을 살아간다고 배운다.
이것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근간을 이루는 체계이다. 이 책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는 스토아 철학 논문을 읽으려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학파의 수장이 아니며, 자신의 글을 남이 읽을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열띤 지적 탐구가 아니라, 우리가 종교적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더 가깝다. 제논이나 크리시포스의 타협 없는 경직성은 경건하고 관용적이며 온화하고 꾸밈없는 그의 천성을 거치면서 부드럽게 변화했다. 스토아학파의 현자에게 삶을 견디게 했던 냉혹한 체념은 그에게 이르러 거의 열망의 분위기로 바뀐다. 그의 책은 의무의 무게와 바쁜 삶의 수많은 성가심을 견뎌내도록 돕는 도덕적 격언과 성찰을 담아,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록한 그의 가장 내밀한 생각들을 담고 있다.
『명상록』을 또 다른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비교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두 책 모두 자기 절제라는 동일한 이상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매일 어제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 인간의 과제여야 한다. '열정을 억제하는 속에 참된 마음의 평화가 깃든다.' '뿌리에 도끼를 대자, 그리하여 열정을 씻어내고 평온한 마음을 갖도록 하자.' 이를 위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만약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을 수 없다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아침이나 저녁에라도 그리하라. 아침에는 뜻을 세우고, 저녁에는 오늘 자신이 말과 행동, 생각 면에서 어떠했는지 따져보라.' 그러나 로마인의 기질이 겸손한 자기 신뢰인 반면, 그리스도인은 좀 더 수동적인 태도인 겸손과 온유, 그리고 신의 임재와 개인적인 친분에 대한 의지를 지향한다. 로마인은 자신의 잘못을 엄격하게 살피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기 눈에 비루하게' 보이게 만드는 자기 비하에는 빠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마음을 거두도록 공부하라'고 권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바쁜 의무의 삶이라기보다 모든 세속적인 것에 대한 경멸과 '모든 낮은 차원의 쾌락을 끊어내는 것'이다. 두 부류 모두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을 그 본연의 무가치함으로 평가한다. '너의 평화를 사람들의 입에 두지 말라'고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의 질책에 호소하는 반면, 로마인은 자신의 영혼에 호소한다. 불의나 불친절이 주는 사소한 성가심에 대해 두 부류는 모두 같은 관대함으로 대한다. '너를 향해 한 말이나 행동이 사소하다고 해서 어찌 슬퍼하는가? 그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며,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네가 오래 산다면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기쁘게 견딜 수 없다면 최소한 인내하며 견뎌라.'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당한 잘못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악의에 더 슬퍼해야 하지만, 로마인은 가해자로부터 손을 씻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고통을 인내하고 다른 사람들의 결점과 모든 종류의 허물을 견디도록 노력하라'고 그리스도인은 말하지만, 로마인은 결코 '모든 사람이 완벽하다면, 우리는 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고통받겠는가?'라는 말을 덧붙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 그 자체의 미덕이라는 관념은 『명상록』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생각이다. 두 부류 모두 인간이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똑같이 깨닫고 있다.'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족할 수 없다'고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우리는 서로 견디고, 서로 도우며, 서로 위로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열정, 즉 고양된 감정과 미지근함의 배제를 중요하게 보았지만, 로마인은 그 일을 행할 때 수반되어야 할 감정보다는 해야 할 의무를 가능한 한 잘 해내는 것을 주된 생각으로 삼았다. 성인에게나 황제에게나 세상은 기껏해야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하다. '진실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라고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고통스러우며, 그림자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는 두 책 사이에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타인을 향해 쓰였지만, 『명상록』은 저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저자가 자신의 설교를 실천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외에 그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명상록』은 저자의 마음 상태를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그 친밀함과 솔직함 속에 이 책의 큰 매력이 있다. 이 기록들은 설교가 아니며, 심지어 참회록조차 아니다. 참회에는 언제나 자의식적인 기운이 서려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고백 속에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독선적이거나 저속해질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허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며, 존 버니언조차 가벼운 실수들을 끔찍한 죄악으로 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저속하지도 독선적이지도 않다. 그는 그 어떤 것도 변명하지 않지만, 악의를 가지고 기록한 것도 없다. 그는 결코 독자 앞에서 폼을 잡지 않으며, 심오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항상 진실하다. 그리고 우리 앞에 드러난 것은 고결하고 평온한 영혼이다. 저속한 악덕은 그에게 아무런 유혹도 되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부수려고 애쓰는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결점들은 대개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것들이다. 내면의 신성한 정신을 섬기기 위해, 인간은 '격렬한 열정과 악한 애정, 모든 경솔함과 허영, 그리고 신들이나 사람들에 대한 모든 방식의 불만으로부터 자신을 순수하게 지켜야' 한다. 혹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쾌락에 더럽혀지지 않고 고통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 흔들림 없는 예의와 배려가 그의 목표이다. '누가 무엇을 하거나 말하든, 너는 선해야 한다.' '누가 잘못을 저질렀는가? 그 잘못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이니, 왜 네가 그것으로 괴로워해야 하는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이 필요하다. 교정이 필요한 자들은 요령과 온유함으로 대해야 하며, 더 나은 것을 배우기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최선의 복수는 그들과 닮지 않는 것이다.' 용서에 관한 수많은 암시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기록들은 사건 직후에 작성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이처럼 자신의 원칙을 상기하고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 말들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신의 제위를 찬탈하려 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일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이처럼 황제는 악은 선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다른 사람들의 각 결점에 대해, 자연은 우리에게 상응하는 덕을 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예를 들어, 배은망덕한 자에 대해서는 해독제로서 선함과 온유함을 주었다.'
적에게 그토록 온화했던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며, 실제로 그의 저작들은 자신을 섬겼던 이들에 대한 관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는 『제1권』에서 친족과 스승들에게 빚진 모든 은혜를 기록했다. 그는 조부에게서 자신의 온화한 성품을 물려받았고, 아버지에게서 겸손함과 용기를 배웠으며, 어머니에게서 신앙심과 너그러움, 그리고 순수한 마음을 배웠다. 루스티쿠스는 자신의 제자에게 삶의 개선이 필요함을 보여주었으니 헛되이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아폴로니우스는 그에게 단순함, 합리성, 감사, 그리고 진정한 자유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다.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지는데, 그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악을 생각하지 않는 그의 선한 천성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그의 마음이 기독교적 이상향인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었다면, 그가 기독교인들을 강인하게 만드는 신앙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혹은 만물이 우연과 운명에 의해 돌아간다면, 그대에게 적절히 관계된 일들에 대해 그대 자신의 섭리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으로 그대는 안녕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는 '우리는 우주를 다스리는 자연이 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만물의 체계 속에서 그 자신의 역할은 너무나 작기에, 그는 이 필멸의 삶에서 평온한 영혼이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떠한 개인적 행복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영혼아, 그대가 그대를 감싸고 있는 육체보다 더 선하고, 단순하고, 더 열려 있고 분명해질 때가 오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는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 운명에 대한 차분한 만족을 두고 하는 말이지, 육체의 굴레를 벗어던질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세상과 명성과 부,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신들은 어쩌면 그를 특별히 보살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각별한 관심은 우주 전반을 향해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의 신들은 모든 인간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아무런 걱정도 관심도 없는 스토아학파의 신들보다는 낫지만, 그가 가진 개인적인 희망은 그보다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그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끝으로 여기는 많은 암시를 남겼을 뿐, 구체적인 언급은 거의 없다.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고 아무것도 소멸될 수 없기에, 그는 자신의 영혼이 언젠가 보편적인 영혼 속으로 흡수되리라 기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기분은 분투하는 피로감 그 자체였다. 그는 철수 신호를 울릴 나팔 소리를 기다리며 좋은 군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그에게는 소크라테스를 그 못지않게 고결한 삶으로 이끌어, 자신이 숭배했던 신들과 존경했던 사람들의 무리로 그를 인도해 줄 죽음에 대한 그 유쾌한 확신은 없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영혼이 흡수되어 자아의 의식을 잃게 될 운명이라고 지성적으로 믿었을지는 모르나, 그러한 신조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끔 느끼듯 그것이 얼마나 불만족스러운 것인지 실감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 그는 비어 있고 헛된 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아 맹목적으로 더듬는다. 그는 말한다. '그대는 배를 탔고, 항해를 마쳤으며, 육지에 도착했으니 이제 내려라. 혹여 다른 삶이 있다면 그곳에도 신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여기에는 논쟁을 위해 경쟁 이론을 가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만약 세속적인 것들이 '꿈에 불과하다면, 실재하는 것으로 깨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멀리 있지 않다. 그가 죽음을 필연적인 변화로 말하며, 변화 없이는 유익하고 수익적인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지적할 때, 그는 혹시 죽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밀알의 변화를 염두에 두었을까? 부패로부터 재창조해내는 자연의 경이로운 힘이 어찌 육체적인 것에만 국한되겠는가. 그의 생각 중 많은 부분은 성 바울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들리며, 가장 기독교적인 황제인 그가 기독교인들에 대해 좋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기이하다. 그에게 그들은 단지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대립에 몰두하는' 분파주의자들일 뿐이다.
『명상록』이 철학으로서 심오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경험 범위 내에 들어온 것들의 본질을 꿰뚫어 볼 만큼 진실한 인물이었다. 고대 종교들은 대체로 외적인 것들에 치중했다. 필요한 의식을 행하면 신들을 달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이러한 의식들은 종종 사소했고 때로는 올바른 감정이나 도덕성마저 훼손했다. 설령 신들이 정의의 편에 서 있었을 때조차, 그들은 의도보다는 행위 자체에 더 신경을 썼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 대로 사람이 행동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대의 생각과 일상적인 고찰이 어떠하든, 시간이 흐르면 그대의 정신도 그와 같아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의 모든 페이지는 그가 생각이 결국 행위로 이어진다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마치 정신이 때가 왔을 때 올바른 원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미리 훈련하는 듯하다. 긴급한 상황이 닥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이미 늦는 법이다.
그는 또한 행복의 참된 본질을 꿰뚫어 본다. '행복이 쾌락에 달려 있다면, 악명 높은 강도나 부도덕하고 가증스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 존속 살해범과 폭군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몫의 쾌락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세상의 모든 쾌락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던 그는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다. '행복한 운명이자 몫이란, 영혼의 선한 성향과 선한 욕구, 그리고 선한 행동이다.'
운명의 아이러니로, 그토록 온화하고 선량하며 조용한 기쁨과 근심 없는 마음을 갈망했던 이 사람이 동서양으로부터 거대한 위험이 닥쳐오던 때 로마 제국의 수장에 앉게 되었다. 수년간 그는 직접 군대를 총지휘했다. 콰디족 앞 진영에서 그는 자신의 『명상록』 제1권을 집필하며, 거친 무기의 소음 속에서도 어떻게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경멸했던 화려함과 영광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야망이나 꿈인 것이, 그에게는 오직 엄격한 의무감으로만 완수할 수 있는 고단한 과업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을 훌륭히 해냈다. 그의 전쟁은 느리고 지루했지만 성공적이었다. 정치가로서의 지혜를 발휘하여 그는 북쪽 야만인 무리가 로마에 가할 위험을 예견하고 이에 대처할 조치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정착 정책은 로마 제국에 2세기의 휴지기를 가져다주었다.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제국의 국경을 엘베강까지 확장하려는 계획을 완수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그의 계획을 단절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역경 속에서도 정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참으로 드문 기회가 주어졌다. 가장 평화로운 전사였으며, 가정생활에서의 조용한 행복을 이상으로 삼았던 웅장한 군주였고, 은둔을 지향했으나 위대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죽거나 증오스러운 존재가 된 자녀들의 자애로운 아버지였던 그의 삶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부족함이 없도록, 그는 적의 얼굴을 마주한 진영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자신의 안식처로 떠났다.
다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주요 영어 번역본 목록이다. (1) 메릭 카소본(1634년), (2) 제러미 콜리어(1701년), (3) 제임스 톰슨(1747년), (4) R. 그레이브스(1792년), (5) H. 맥코맥(1844년), (6) 조지 롱(1862년), (7) G. H. 렌달(1898년), (8) J. 잭슨(1906년). 1882년에 출간된 르낭의 『기독교 기원사』에 수록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를 다룬 책 중 가장 생동감 있고 독창적이다. 페이터의 『에피쿠로스주의자 마리우스』는 그 시대를 다시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외부 주석이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제1권
자기 자신에 관하여:
안토니누스가 부모, 친구, 스승 등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그들의 좋은 본보기나 좋은 조언과 충고를 기록함:
번호나 절로 구분함.
안토니누스 제6권 제48절. 기쁨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그대 곁에 사는 이들에게서 관찰한 좋은 점과 특별한 재능을 떠올리고 묵상하라.
어떤 이에게는 근면함이, 다른 이에게는 겸손함이, 또 다른 이에게는 너그러움이, 그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대 곁에 사는 이들의 성품 속에서 뛰어난 여러 덕목의 닮은 점과 일치하는 면들을 보는 것만큼 그대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으며, 그것들이 마치 동시에 그대 앞에 나타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그것들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