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현신하는데 왜 없겠어. 현신하면 그에 따른 대가도 치러야지. '나는 사탄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것치고 내게 낯선 것은 하나도 없다.'"
"뭐, 뭐라고? 나는 사탄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것치고 내게 낯선 것은 하나도 없다…… 악마 치고는 꽤 괜찮은 소리인데!"
"드디어 자네 마음에 들어서 기쁘군."
"그런데 그건 자네가 내게서 따온 게 아니잖아." 이반이 갑자기 놀란 듯 멈춰 서서 말했다. "그건 나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건데, 이거 이상하군……."
"새로운 거지, 안 그래? 이번엔 정직하게 자네에게 설명해 주지. 들어봐. 꿈, 특히 악몽 속에서는, 뭐 소화 불량 따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가끔 아주 예술적인 꿈을 꾸곤 해. 더없이 복잡하고 현실적인 실재, 어떤 사건들이나 심지어는 하나의 사건 세계를 보게 되지. 그것들은 더없이 정교한 줄거리와 예기치 못한 세부 사항들로 엮여 있어서, 인간의 숭고한 발현부터 셔츠 앞단추 하나에 이르기까지, 맹세컨대 레프 톨스토이라 해도 그렇게는 못 쓸 정도지. 그런데 그런 꿈을 꾸는 건 소설가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들, 이를테면 관리나 칼럼니스트, 신부 같은 자들이야……. 심지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얘기도 있어. 어떤 장관은 자신이 내놓은 최고의 아이디어들은 전부 잠잘 때 떠오른 것이라고 내게 실토하기도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자네의 환각이긴 하지만 악몽 속에서처럼 자네가 여태껏 떠올린 적 없는 독창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잖아. 그러니 나는 자네 생각을 되풀이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지 자네의 악몽일 뿐, 그 이상은 아니지."
"거짓말 마. 네 목적은 바로 네가 내 악몽이 아니라 독자적인 존재라는 걸 믿게 하려는 거잖아. 그런데 방금 네가 직접 꿈이라는 걸 인정했어."
"내 친구, 오늘은 특별한 방식을 취해본 거야. 나중에 설명해 주지. 잠깐,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래. 그때 내가 감기에 걸렸는데, 자네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저쪽에서……."
"저쪽이 어디야? 말해봐, 대체 얼마나 더 머물 건가? 당장 떠날 순 없어?" 이반이 거의 절망에 빠진 듯 외쳤다. 그는 서성이는 것을 멈추고 소파에 앉아 다시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는 젖은 수건을 머리에서 떼어내 성가신 듯 내던졌다. 분명 아무런 효과도 없는 모양이었다.
"자네 신경이 쇠약해졌군." 신사가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아주 우호적인 태도로 덧붙였다. "자네는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못마땅해하는데, 그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라네. 당시 나는 장관을 노리던 페테르부르크의 한 귀부인이 여는 외교 사교 파티에 급히 가는 중이었지. 프랙 코트에 하얀 넥타이, 장갑까지 갖췄지만, 나는 아직 갓 알 만한 곳에 있었거든. 자네들 세상으로 오려면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야 했지……. 물론 눈 깜짝할 사이지만 태양 빛도 여기까지 오는 데 8분이나 걸리는데, 프랙 코트에 조끼를 풀어헤친 채였으니 말이야. 정령은 얼지 않지만, 일단 현신하고 나면……. 아무튼 멋을 부리고 출발했지. 그런데 그 공간 속, 에테르 속, 궁창 위에 있다는 그 물속은 어찌나 추운지……. 아니, 추위라고 부를 수도 없지. 150도 영하라고 하면 상상이 가나? 시골 처녀들이 하는 장난 중에 영하 30도에서 갓 들어온 사람에게 도끼를 핥아보라고 하는 게 있지. 혀가 순식간에 달라붙어서 바보가 껍질을 다 뜯어내고 피를 보게 되잖아. 고작 30도에서도 그런데 영하 150도에서라면 도끼에 손가락만 대도 멀쩡하지 못할걸. 뭐, 거기 도끼가 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럼 그곳에 도끼가 있을 수도 있단 말인가?" 이반 표도로비치가 멍하니 혐오 섞인 투로 말을 끊었다. 그는 자신의 헛것을 믿고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도끼라고?" 손님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래, 거기서 도끼가 어떻게 되겠냐고!" 이반 표도로비치가 흉포하고 집요한 고집으로 갑자기 소리쳤다.
"우주 공간에서 도끼가 어떻게 되냐니? 엉뚱하긴! 더 멀리 날아가 버리면 나도 모르게 지구 주위를 맴돌며 위성 노릇을 하겠지. 천문학자들이 도끼의 출몰 시각을 계산하고 가추크가 달력에 실어주면 그뿐이라네."
"너는 멍청해, 끔찍하게 멍청하다고!" 이반이 심술궂게 말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똑똑하게 해, 안 그러면 안 들을 거야. 너는 나를 사실주의로 굴복시키고 네가 실재한다고 믿게 하려는 거겠지만, 나는 네가 실재한다고 믿고 싶지 않아! 절대 안 믿어!!"
"난 거짓말 안 해, 전부 사실이야. 유감스럽게도 진실이란 건 거의 항상 재미가 없지. 보아하니 자네는 내게 대단하고도 아름다운 무언가를 기대하는 모양인데, 정말 안됐군. 난 내 능력껏 보여줄 뿐이니까."
"철학적인 척하지 마, 당나귀 같은 놈!"
"오른쪽 몸이 다 마비돼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무슨 철학 타령인가.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가 봤지. 병을 진단하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해서 내 병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읊어대지만, 정작 고치지는 못하더군. 웬 열정적인 학생 하나가 나타나선 내가 죽더라도 무슨 병으로 죽는지는 확실히 알게 될 거라지 뭐야! 게다가 이 의사 놈들은 무조건 전문의한테 떠넘기기 일쑤야. 자기들은 진단만 할 뿐이니 이런저런 전문의한테 가보라는 거지. 그쪽이 고쳐줄 거라고 말이야. 완전히, 아주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옛날처럼 모든 병을 다 고쳐주던 의사는 이제 없고, 신문 광고에 이름 올리는 전문의들만 판을 치니 말이야. 코가 아프다고 하면 파리로 보내. 거기에 코를 전문으로 보는 유럽의 대가가 있다는 거야. 파리에 도착해서 코를 보여주면 그 자가 그러지. '오른쪽 콧구멍은 고칠 수 있지만 왼쪽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못 고치니, 제 진료 후에 빈으로 가서 왼쪽 콧구멍을 전문으로 보는 의사한테 가보십시오.' 이게 말이 되나? 그래서 민간요법에 매달려 봤지. 어떤 독일인 의사가 목욕탕 평상에서 꿀과 소금을 바르고 문지르라고 하더군. 목욕이나 한 번 더 하자는 심산으로 가서 온몸에 덕지덕지 발랐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어. 절망 끝에 밀라노에 있는 마테이 백작에게 편지를 썼더니 책이랑 물약을 보내주더군. 그건 그렇다 치고, 세상에, 고프의 맥아 추출물이 효과를 볼 줄이야! 우연히 사서 한 병 반을 마셨더니 춤이라도 출 수 있을 만큼 씻은 듯이 나았지 뭐야. 고마운 마음에 신문에 '고맙다'는 글을 실으려 했어.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온 거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 어떤 편집국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거야! '그건 너무 시대착오적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예요. 악마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익명으로 실으시는 게 어떠냐'고들 하더군. 익명으로 하면 무슨 '감사'가 되겠어. 직원들에게 웃으며 말했지. '요즘 시대에 신을 믿는 건 시대착오적일지 몰라도, 나는 악마니까 나를 믿는 건 괜찮지 않겠소?' 그랬더니 다들 '무슨 말인지 알죠, 누가 악마를 안 믿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 됩니다. 우리 방침에 어긋나거든요. 차라리 농담처럼 실어볼까요?' 하더군. 농담조로 하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관뒀지. 결국 실리지 못했어. 믿어지나? 그게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어. 내게는 감사와 같은 가장 숭고한 감정조차 내 사회적 지위 때문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니까."
"또 철학 타령이군!" 이반이 증오에 차 이를 갈며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하지만 가끔 불평이라도 안 할 수가 없잖아. 나는 모함받은 인간이라고. 자네는 틈만 나면 내가 멍청하다고 말하지. 젊은 사람이라 딱 보이네. 내 친구, 지능이 다가 아니야! 난 본래 마음이 착하고 유쾌한 사람이야. '나도 보드빌 같은 걸 몇 편 썼거든.' 자네는 나를 머리 세어버린 흘레스타코프라고 단정 짓는 모양인데, 내 운명은 훨씬 더 심각해.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초의 임무 때문에 나는 '부정'하도록 정해졌지만, 정작 나는 본심이 착해서 부정이란 건 전혀 할 줄 모른단 말이지. 하지만 부정하라고들 하지. 부정 없이는 비평이 성립할 수 없고, '비평란' 없는 잡지가 어디 있겠어? 비평이 없으면 '호산나'만 남을 뿐이지. 하지만 삶에는 '호산나'만으로는 부족해. 이 '호산나'가 의심의 용광로를 거쳐야만 하는 법이니까. 뭐 이런 식이지. 어쨌든 난 이런 일에 관여 안 해. 내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책임질 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희생양 하나를 뽑아 비평란에 글을 쓰게 했고, 그렇게 삶이 만들어진 거야. 우리는 이 희극을 이해하고 있지. 예를 들어, 나는 솔직하고 단순하게 내 소멸을 요구해. 그런데 안 된대. 살라고 하더군.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나. 세상이 온통 이성적이기만 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나 없이는 아무런 사건도 없을 테니, 사건이 일어나려면 내가 필요했던 거지. 그래서 억지로 비위를 맞추며 사건을 만들기 위해 명령대로 비이성적인 짓을 저지르는 거야. 사람들은 이 모든 희극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말이야. 그게 그들의 비극이지. 물론 고통받기도 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살아 있어. 환상 속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고. 고통이야말로 곧 삶이니까. 고통이 없다면 거기 무슨 즐거움이 있겠어. 모두가 끝없는 기도문으로 변해버릴걸. 그건 성스럽긴 해도 좀 지루하잖아. 그럼 나는? 나는 고통받으면서도 살아 있질 않아. 나는 불확정 방정식의 X지. 모든 끝과 시작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나 자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삶의 유령 같은 존재야. 자네 웃는군…… 아니, 안 웃는구나. 다시 화가 난 거야. 자네는 늘 화를 내지. 자네는 오로지 지성만 찾지만, 나는 다시 말하겠어. 저 별 너머의 삶도, 모든 지위와 명예도 다 바칠 수 있다고. 오로지 7푸드나 나가는 상인 부인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께 촛불을 켤 수만 있다면 말이야."
"설마 너마저 신을 안 믿는다는 건 아니겠지?" 이반이 증오에 차 비웃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진심으로 묻는 거라면……."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반이 다시 흉포하고 집요하게 소리쳤다.
"아, 정말 진심이군? 내 친구, 맹세컨대 나도 몰라. 정말 엄청난 말을 해버렸군."
"모른다고? 그런데 신을 본다고? 아니, 너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야. 너는 바로 나라고, 너는 나 자신이고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쓰레기야, 내 환상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자네가 원한다면 말인데, 나도 자네와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있어. 그게 공평하겠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 이건 확실히 알고 있지. 하지만 내 주변의 모든 것들, 이 세계들, 신, 심지어 사탄 그 자체까지도 내게는 증명된 게 없어. 그것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지 나의 에마나시옹(유출)일 뿐인지, 태초부터 유일하게 존재해 온 내 자아의 순차적인 발현일 뿐인지 말이야……. 짧게 줄일게. 자네, 지금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며 벌떡 일어날 것 같거든."
"차라리 농담이라도 하나 해보지 그래!" 이반이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농담 하나가 있네. 바로 우리 주제와 딱 맞는 건데, 농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전설이지. 자네는 나더러 믿음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신을 보면서도 믿지 않는다'고 하더군. 하지만 내 친구여,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나뿐인가? 요즘은 우리 쪽 사람들도 전부 다 이상해졌어. 다 자네들 학문 때문이지. 원자가 있고 오관이 있고 4원소가 있던 시절엔 그럭저럭 앞뒤가 맞았어. 원자는 고대에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우리 사이에 자네들이 발견했다는 '화학 분자'니 '원형질'이니, 그 외에 악마만이 알 법한 것들이 알려지면서부터 우리도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단 말이야. 그냥 혼란이 시작된 거지. 가장 큰 문제는 미신과 험담인데, 우리 쪽도 자네들만큼이나, 아니 조금 더 심할 정도로 험담이 많아. 결국 고발까지 이어지지. 우리에게도 그런 '정보'를 받는 부서가 하나 있거든. 어쨌든 이 야만적인 전설은 우리 중세 시대의 것인데, 자네들 중세가 아니라 우리네 중세 말이야. 우리 쪽 사람들조차도 칠 푸드(약 115kg)나 나가는 상인 부인들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지. 그건 자네들 상인 부인이 아니라 우리 상인 부인들이야. 자네들한테 있는 건 우리한테도 다 있어. 이건 내가 자네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밝히는 우리만의 비밀인데, 금지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 전설이란 건 낙원에 관한 거야. 여기 자네들 지상에 어떤 사상가이자 철학자가 살았는데, 그는 '법률도, 양심도, 신앙도 전부 부정'했고, 무엇보다 내세를 부정했지. 그가 죽었을 때 그는 곧바로 어둠과 죽음으로 떨어질 줄 알았는데, 눈앞에 내세가 나타난 거야. 그는 깜짝 놀라 분개하며 말했지. '이건 내 신념과 모순된다!' 그러자 그 대가로 형벌을 받았어……. 그러니까 자네, 미안하게 됐네. 내가 들은 그대로 전하는 거라, 이건 단지 전설일 뿐인데…… 그에게 어둠 속에서 1조 킬로미터를 걸어가라고 판결을 내렸거든. 우리도 요즘은 킬로미터를 쓰니까 말이야. 그 1조 킬로미터를 다 걸으면 낙원의 문을 열어주고 모든 죄를 사해주겠다는 거였지."
"그럼 그 1조 킬로미터 말고 저세상에는 어떤 고통이 있지?" 이반이 무언가 기묘한 활기를 띠며 말을 끊었다.
"고통이라니? 아, 묻지 말게. 예전엔 이랬다저랬다 했지만, 요새는 도덕적인 고통이 늘었지. '양심의 가책'이니 하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들 말이야. 그것도 다 자네들 때문이야. 자네들 풍습이 '유화'되면서부터 생긴 거지. 그래, 누가 이득을 봤나? 염치없는 놈들만 이득을 봤지. 양심이 아예 없으니 가책을 느낄 리가 있나. 반대로 양심과 명예를 지키던 정직한 사람들만 고통받게 됐어……. 준비되지 않은 토양에 남의 나라 제도나 베껴다가 개혁을 하려니 피해만 막심한 거지! 차라리 옛날 방식이 훨씬 나았어. 아무튼 그 1조 킬로미터를 가라는 판결을 받은 자는 잠시 서서 지켜보다가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버렸어. '가지 않겠다. 내 원칙상 안 갈 거야!'라고 말이지. 러시아의 계몽된 무신론자의 영혼을 고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버틴 요나 예언자의 영혼과 섞어놓은 것, 그게 바로 길 위에 드러누운 이 사상가의 성격이지."
"그래서 길 어디에 드러누웠다는 거야?"
"글쎄, 드러누울 데야 있었겠지. 왜 안 웃나?"
"잘하는군!" 이반이 여전히 이상하리만치 흥분한 상태로 외쳤다. 이제 그는 뜻밖의 호기심을 보이며 듣고 있었다. "그래, 그럼 지금도 누워 있는 건가?"
"문제는 안 누워 있다는 거지. 천 년 가까이 누워 있다가 결국 일어나서 걸어갔거든."
"참 멍청한 놈이군!" 이반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영원히 누워 있는 거나 1조 베르스타를 걷는 거나 다를 게 뭐가 있어? 1조 년은 걸릴 길 아냐?"
"그보다 훨씬 더 걸리지. 연필이랑 종이만 있으면 계산해 볼 수 있는데 아쉽군. 아무튼 그 녀석은 벌써 다 도착했어. 거기서부터가 진짜 웃기는 얘기지."
"도착했다고? 그 1조 년이라는 시간을 어디서 구한 거야?"
"자네는 자꾸 우리가 사는 지금의 지구만 생각하는군! 지금의 지구도 아마 1조 번은 반복됐을 거야. 다하고, 얼어붙고, 갈라지고, 가루가 되고, 다시 근원적인 원소로 분해됐다가, 다시 궁창 위의 물이 되었다가, 그러다 다시 혜성이 나타나고, 태양을 지나 태양에서 지구가 생겨나고……. 이런 진화 과정이 아마 무한히 반복되고 있을 걸? 모든 게 똑같은 모습으로,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말이지. 정말이지 형편없을 정도로 지루한 일이야……."
"그래, 그래서 다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지?"
"막 낙원의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섰을 때, 2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말이야. 시계로 잰 시간으로 말이지(내 생각엔 그 시계도 그 비싼 놈 주머니 속에서 진작에 원소로 분해됐겠지만). 2초도 안 돼서 그는 외쳤어. 이 2초 동안 1조 킬로미터는커녕 1조의 1조 제곱만큼이나 갈 수 있다고 말이야! 한마디로 '호산나'를 불렀는데, 너무 지나쳤던 모양이야. 그래서 거기 좀 더 고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엔 악수조차 해주려 하지 않았지. 너무 급격하게 보수주의자로 변절했거든. 러시아인 기질이지.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전설일 뿐이야. 내가 들은 그대로 옮기는 것뿐이라고. 우리 쪽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어."
"딱 걸렸어!" 이반이 마치 무언가를 완전히 떠올린 듯, 거의 어린아이 같은 기쁨으로 소리쳤다. "그 1조 년에 대한 농담, 그건 내가 직접 지어낸 거야! 열일곱 살 때 중학교에 다녔는데…… 그때 그 농담을 지어서 모스크바에 사는 코로프킨이라는 친구에게 들려줬었지……. 그 농담은 너무나 독특해서 어디서 따올 수도 없어. 잊고 있었는데…… 이제 무의식중에 기억이 난 거야. 네가 말해준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해낸 거라고!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조차 무의식중에 수천 가지 일이 떠오르듯…… 꿈속에서 떠올린 거지. 너는 바로 그 꿈이야! 너는 꿈일 뿐, 존재하지 않아!"
"나를 부정하는 그 열띤 태도를 보니," 신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네가 어쨌든 나를 믿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군."
"조금도 안 믿어!"
"하지만 1,000분의 1은 믿잖아. 홈오퍼시(동종요법) 식의 미량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강력한 것일지도 모르지. 인정해, 1만 분의 1이라도 믿는다고 말이야……."
"단 1분도 안 믿어!" 이반이 격렬하게 외쳤다. "그렇지만…… 너를 믿고 싶긴 해!" 그가 돌연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에헤! 이런, 고백이라니! 하지만 난 친절하니까 여기서도 도와주지. 들어봐. 나를 낚은 게 아니라 내가 자네를 낚은 거야! 자네가 이미 잊어버린 그 농담을 내가 일부러 들려준 거라고. 자네가 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게 하려고 말이야."
"거짓말! 네가 나타난 목적은 네가 존재한다는 걸 나한테 납득시키려는 거잖아."
"바로 그거야. 하지만 흔들림, 불안,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갈등…… 이건 자네처럼 양심적인 사람에겐 때때로 목을 매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지. 자네가 나를 아주 조금은 믿고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이 농담을 들려줌으로써 자네에게 최종적인 불신을 불어넣은 거야. 나는 자네를 신앙과 불신앙 사이로 번갈아 끌고 다니지. 여기엔 내 나름의 목적이 있어. 새로운 방법이지. 자네가 나에 대해 완전히 믿음을 잃게 되면, 자네는 즉시 나를 눈앞에 두고 내가 꿈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테니까. 내가 자네를 잘 알거든. 그렇게 되면 나는 내 목적을 달성하는 거야. 내 목적은 숭고하지. 나는 자네에게 아주 작은 믿음의 씨앗을 던져줄 뿐인데, 거기서 거대한 참나무가 자라날 거야. 자네는 그 참나무에 앉아 '은둔하는 교부나 정결한 여인'이 되고 싶어 하겠지. 왜냐하면 자네는 내심 간절히, 정말 간절히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 메뚜기나 씹어 먹으면서 사막으로 구원받으러 떠나겠지!"
"그러면 이 악당아, 내 영혼을 구원하려고 애쓰는 거란 말인가?"
"가끔은 좋은 일도 좀 해야지. 보아하니 자네, 꽤 화가 났군!"
"광대 같은 놈! 그럼 너는 그런 자들도 유혹해본 적이 있나? 메뚜기나 먹으면서 벌거벗은 사막에서 17년 동안이나 기도하며 이끼가 낀 채로 사는 그런 자들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