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적
그 무렵 후궁에서 후지쓰보라 불리던 이는 죽은 사다이진의 딸인 뇨고였다. 미카도가 아직 도구로 계실 때 가장 먼저 입궐했던 사람이었기에 각별한 친밀함을 느끼셨고 애정을 품고는 계셨으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구 쪽에는 황자들도 많이 태어나 각기 훌륭하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뇨고는 내친왕 한 명만을 낳았을 뿐이었다. 자신이 후궁의 경쟁에서 실패하는 슬픈 운명을 본 대신, 이 공주를 먼 장래까지 유일한 위안으로 삼아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로 만들고자 뇨고는 정성껏 공주를 보살폈다. 용모 또한 아름다웠기에 미카도께서도 아끼셨고, 주구에게서 태어난 온노이치노미야를 세상에 비할 데 없을 정도로 미카도께서 존중하시기에 세상이 각별한 경의를 표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황녀로서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데 있어 별로 뒤처지는 일도 없었다. 뇨고의 아버지 대신의 세력이 컸던 잔영은 아직 집에 남아 있었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덕분에 온노니노미야의 시녀들 복장을 비롯하여 궁전 내부를 계절에 따라 바꾸는 장식도 화려하게 꾸미는 등, 사치스러우면서도 중후한 귀부인의 품격을 잃지 않도록 정성껏 보살폈다. 공주가 열네 살이 되는 해에 모기 의식을 치르려고 그 봄부터 전심으로 준비하며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뇨고는 바랐다. 집안 조상 대대로 내려온 보물들도 성대한 의식에 쓰고자 찾아내게 하는 등 매우 열성적이던 뇨고가 여름 무렵부터 모노노케에 시달리기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 여기신 미카도께서도 슬퍼하셨다. 상냥한 사람이었기에 전상 관인들도 궁궐 안이 적막해진 듯하다며 아쉬워했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던 여관들도 모두 후지쓰보의 뇨고를 그리워했다. 온노니노미야는 더욱이 어린 소녀의 마음으로 더욱 외롭고 슬프게 잠겨 있을 것을 가엾고 걱정스럽게 여기신 미카도께서는, 사십구재가 지나자마자 조용히 궁궐로 불러들이셨다. 그 후지쓰보에 가셔서 미카도께서는 온노니노미야를 위로하고 계셨다. 검은 상복 차림의 공주는 더욱 가련해 보였고 품위가 뛰어났다. 성품 또한 총명하여 어머니 뇨고보다 차분하고 깊이가 있는 것을 알고 안심은 하셨으나, 실제 문제로는 이 공주에게 확실한 후원자로 볼 만한 숙부가 없었고, 겨우 뇨고와 이복형제인 오쿠라쿄, 슈리노다유 등이 있을 뿐이었기에, 각별히 세상의 존중을 받지도 못하고 지위도 높지 않은 사람을 배경으로 두는 것이 여인의 몸으로서는 불리한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점이 가여워, 미카도께서는 홀로 남은 부모로서 이 공주의 일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괴롭기도 하셨다.
뜰의 국화꽃이 아직 시들지 않고 한창일 무렵, 하늘도 시구레가 내려 적막한 날이었으나, 미카도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후지쓰보로 가셔서 고인이 된 뇨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시니 공주는 대범하면서도 아이 같지 않게 나무랄 데 없는 대답을 하기에 미카도께서는 귀엽게 여기셨다. 이러한 이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할 남편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스자쿠인이 히메미야를 로쿠조 원으로 시집보냈던 때를 떠올려 보시면, 당시에는 아쉬운 일이라며 황녀는 혼자 지내는 것이 신성해서 좋다는 말도 세상에서 했다 하지만, 미나모토 주나곤 같은 훌륭한 자식을 두어 그가 곁에 있는 덕분에 예전과 다름없는 세상의 존경도 온노산노미야가 받고 있는 사실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 독신으로 지낸다면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서는 본의 아니게 과실을 범하게 되어 자연히 남들로부터 경멸을 받는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미카도께서는 계속 생각하셨다. 어쨌든 자신의 지위에 있을 동안 사위를 정해두고 싶은데 과연 누가 좋은 배필이 될 만한 인물일까 생각하시니, 그 온노산노미야의 아들인 미나모토 주나곤 외에는 적당한 사위가 없다는 쪽으로 미카도께서 생각이 귀결되었다. 내친왕의 남편으로서 어떤 점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 없으며, 정인을 따로 두었다 하더라도 아내가 된 공주를 욕되게 할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정실이라는 것을 언제까지나 두지 않고 있을 리는 없는 법이기에, 그전에 자신의 의향을 그에게 은연중에 알리고 싶다고 미카도께서는 때때로 생각하셨다.
어느 날 미카도께서는 바둑을 두고 계셨다. 해 질 녘이 되어 시구레가 내리는 것도 운치가 있고, 국화에 저녁 빛이 비친 색깔도 아름다운 것을 보시고는 구로도를 불러,
“지금 전상의 방에는 누가 누가 있느냐?”
라고 물으셨다.
“나카쓰카사쿄 친왕, 고즈케 친왕, 주나곤 미나모토 아손이 계십니다.”
“주나곤 아손을 이리로 오라고 하라.”
라는 분부가 있어 가오루가 입궐했다. 과연 미나모토 주나곤은 이렇듯 특별한 총애를 받아 불리는 사람답게, 멀리서도 풍기는 향기를 비롯하여 높은 가치가 느껴지는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 시구레는 평소보다 밝아서 느낌이 좋은 날이라 생각되는데, 음악은 듣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는구나. 별것 아니더라도 무료함을 달래는 데는 우선 이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라고 미카도께서 말씀하시고는, 바둑판을 곁으로 가져오게 하여 가오루에게 대국을 명하셨다. 평소 이렇게 친근하게 곁으로 부르시는 습관이 있었기에 가오루는 별달리 아무 생각 없이 있었는데,
"좋은 내깃거리가 있어야 할 텐데, 조금 진 정도로 줄 수는 없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라는 분부가 있었다.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가오루는 평소보다 긴장한 기색이었다. 바둑 승부에서 세 판 중 두 판을 미카도께서 지셨다.
“좋은 내깃거리가 있어야 할 텐데, 조금 진 정도로 줄 수는 없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이 분부에 대답은 하지 않고 가오루는 섬돌을 내려가 아름다운 국화 한 가지를 꺾어 왔다. 그리고,
세상의 흔한 울타리에 피어난 꽃이라면 마음 가는 대로 꺾어 보련만.
이 노래를 읊은 것은 미카도께서 생각하시는 바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서리를 견디지 못해 시든 뜰의 국화이지만, 남은 빛깔은 아직 바래지 않았구나.
라고 미카도께서 말씀하셨다. 이렇듯 때때로 은근히 비치시는 뜻을 가오루는 직접 들으면서도, 본래 성품이 그러하여 곧바로 적극적으로 나서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결혼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여러 혼담이 있었고, 그분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계속 거절해 왔는데, 이제 와서 아내를 맞이하여 속인과 다름없음을 표방하던 자가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 스스로도 묘한 일이라 여겼다. 그리워 견딜 수 없는 사람이면 모를까, 라며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한편, 이분이 중궁 소생의 공주라면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라 여기는 주나곤은 황송하게도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다이진은 로쿠노키미와의 혼담에 효부쿄 친왕이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였어도, 가오루가 한 번은 그렇게 거절해 보였지만 간곡히 부탁하면 마지못해서라도 결혼해 줄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부쿄 친왕은 정면으로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고, 로쿠노키미와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고 자주 편지를 보내고 있으니 그것이 진실성이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아내로 삼으면 애정이 생기지 않을 리 없으며, 아무리 충실한 남편이 될 사람이 있다 해도 지위가 낮은 남자에게 주는 것은 세상 체면도 나쁘고 본인의 마음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여전히 효부쿄 친왕을 목표로 삼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딸에게 좋은 사위를 얻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미카도조차 딸을 위해 사위 고르는 수고를 하고 있으니, 평범한 집안의 딸이 혼기를 놓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등 미카도의 생각에 다소 비난조로 말하기도 했다. 중궁에게 효부쿄 친왕과의 혼담이 성사되도록 호소하는 일이 잦아지자 황후도 곤란해져서 친왕에게,
"안쓰러울 정도로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며 대신이 기다려 왔는데, 핑계를 대며 언제까지나 응하지 않는 것도 무정한 일이랍니다. 친왕이라는 것은 후원자 나름으로 빛이 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법이에요. 미카도께서도 이제 세상이 말년으로 가고 있다고 늘 말씀하시지 않니. 너는 잘 생각해야 한다. 보통 사람의 경우 정해진 부인을 두고 다시 결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란다. 그래도 저 대신이 성실하기만 하면서도 두 명의 부인을 두어 양쪽을 똑같이 사랑하며 지낼 수 있다는 실례도 있지 않니? 하물며 너는 미카도의 뜻대로 지위가 갖춰지면 몇 명이라도 곁에 둘 수 있는 것 아니냐."
라고 평소보다 길게 훈계하시는 말씀을 듣고, 효부쿄 친왕 본인도 결코 무관심할 수 없는 여성이었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권문세가에 사위로서 거창한 대우를 받는 것이 자유를 잃는 일일 것이라 여겨 그 점이 싫었지만, 어머니 말씀대로 이 대신의 반감을 많이 사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제 와서는 저항할 힘도 약해졌다. 다정한 성품이라 저 아제치 다이나곤 댁의 고바이의 공주도 아직 단념하지 못하고, 여전히 꽃이나 단풍이 필 때면 호기심의 대상으로 그곳에도 기별을 보내고 있었다.
그해는 별일 없이 지나갔다. 온노니노미야의 상기도 끝났으므로 미카도께서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간곡히 원하시기만 하면 바로 허락하실 뜻이 있으신 듯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오루에게 전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기에 너무 모르는 척 냉담하게 구는 것도 무례한 일이라 여겨,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온노니노미야를 모시는 사람을 통해 구혼자로서 편지를 가끔 보내기도 하게 되었지만, 상대하지 않는 태도 등을 보일 리는 만무했다. 미카도께서 몇 월경을 결혼 시기로 생각하신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듣고, 본인도 허락하실 뜻이 있음은 짐작되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죽은 우지의 그 사람만을 그리워하고 있었고, 이 슬픔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이토록 마음이 이어질 인연이 있었던 사람과 끝내 부부가 되지 못한 것은 어찌 된 일인지 이상하게 여겼다. 신분이 아무리 낮더라도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이라면 자신은 아내로 사랑할 것인데, 반혼향의 연기가 그렸다는 환영이라도 볼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뿐이었기에, 가오루에게는 온노니노미야와의 결혼 성사를 기다리는 마음조차 없었다.
사다이진 측에서는 로쿠노키미와의 결혼 준비에 착수하여, 8월경으로 혼례 날짜를 잡겠다고 중궁께 아뢰었다. 이 소식을 니조인에 있는 나카노키미도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나처럼 든든한 배경 하나 없는 여자에게는 반드시 행복이 깨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오늘까지 지내온 것이다. 다정한 성품이라는 소리는 익히 들어왔고 믿을 수 없는 분이라 생각하면서도, 함께 있는 동안은 원망스러운 행동을 보이지 않으셨고, 영원히 변치 않을 깊은 사랑을 약속만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권문세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면 내 마음이 어찌 평온할 수 있을까. 보통 신분의 남자처럼 아예 나를 버리고 떠나지는 않으시겠지만, 얼마나 많은 번민을 겪어야 할 것인가. 나는 아무래도 박명한 운명을 타고났으니 결국에는 또다시 우지의 산골로 돌아가게 되리라 생각하니, 그대로 머무는 것보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 우지의 마을 사람들에게도 조롱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거듭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결혼하여 산장을 나온 내 잘못이 부끄럽고,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 원망스럽다고 나카노키미는 생각했다. 언니는 마음이 너그럽고 부드러운 면모만 겉으로 드러났지만, 정신은 확고한 분이었다. 주나곤이 지금도 잊지 못할 만큼 언니의 죽음을 계속 슬퍼하고 있지만, 만약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의 나처럼 번민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니는 그런 미래를 잘 통찰하여 저 사람의 아내가 되려 하지 않았고, 여러 방면으로 몸을 피하며 주나곤의 연정에서 계속 벗어나려 했으며 결국에는 비구니가 되려 하지 않았던가. 설령 목숨을 건졌더라도 반드시 불제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깊은 사려가 있던 분이었다. 아버지도 언니도 나를 더할 나위 없이 경솔한 여자라고 저세상에서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니 부끄럽고 슬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을 말하며 질투심 많은 마음을 보일 필요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카노키미는 친왕의 새로운 혼담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척하며 지냈다.
친왕은 이 혼담이 결정된 뒤로는 평소보다 더 많은 애정을 보여주었고, 그리운 눈빛으로 장래에 대해 매일같이 이야기하며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부부의 사랑을 약속하곤 했다. 나카노키미는 지난 5월경부터 평소와 다른 몸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크게 고통스러워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식욕이 감퇴하여 매일 눕기만 했다. 임부를 가까이 본 경험이 없던 친왕은 그저 날씨가 더워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셨지만, 역시나 의심스러운 마음도 들어,
"혹시 당신에게 아이가 생긴 것은 아니오? 임부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힘들어하는 법이라 들었소."
라고 말씀하셨지만, 나카노키미는 부끄러워 아무렇지 않은 척했기에, 나서서 아뢰는 사람도 없어 친왕께서도 확실히 알지는 못하셨다.
8월이 되자, 사다이진의 공주 댁으로 친왕이 처음 가시는 날이 언제인지가 밖을 통해 나카노키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친왕은 거리를 두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말씀을 꺼내는 것이 가엾고 안쓰러워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을 부인은 오히려 원망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몰래 하는 일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을 언제라고조차 말씀하지 않으시니, 나카노키미가 원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부인이 니조인으로 오신 뒤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소에 가시더라도 곧바로 이곳으로 돌아오셨고, 다른 곳에 들러 묵고 오시는 일 같은 것은 친왕께서 하지 않으셨다. 연인의 댁을 찾아가 부인에게 독수공방을 지키게 하는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결혼 생활을 하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염려되어, 미리 조금씩 습관을 들이려고 가끔 어소에서 숙직하시곤 하는 것을 부인에게는 그마저도 모두 원망스러운 쪽으로만 해석되었을 것이다. 주나곤 또한 안쓰러운 일이라며 이 문제에 처한 나카노키미를 걱정했다. 친왕은 바람기가 있는 성품이니, 지금은 사랑하신다 해도 화려하고 새로운 부인 쪽으로 마음이 많이 쏠리게 될 것이다. 혼가(婚家) 또한 위세를 믿는 곳이니 끊임없이 사위를 붙잡아 두려 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예전과는 달라진 태도 때문에 나카노키미가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는 날이 이어질 것 같아 가여웠다. 이런 생각에 미칠 때마다 '이 무슨 일인가, 잘못된 것은 나 자신이로구나.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친왕께 양보했단 말인가' 싶었다. 죽은 공주를 연모하게 된 뒤로는 종교적으로 맑았던 마음도 불투명해지고 맹목적이 되어, 모든 정열을 모아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도 동의를 얻지 않은 채 남성의 힘으로 승리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 여겨, 단 조금이라도 그 사람에게 사랑받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랑이 이루어지길 꿈꾸며 미래의 즐거운 공상만 하였건만, 그 사람은 사랑을 느끼지 않는 태도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를 아주 냉담하게 대하지는 않는다는 증거로 '나와 같은 처지라 생각하라'며 나카노키미와의 결혼을 권했지만, 나로서는 그저 그 사람의 태도가 분하고 원망스러웠기에 그 사람의 계획을 망쳐서 친왕과 나카노키미의 결혼을 성사시켜 버리면 어떨까 하는 무리한 길을 택해 광기 어린 중매쟁이가 되었던 때를 떠올리니, 잘못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며 가오루는 거듭 후회했다. 친왕께서도 아무리 사정이 어떠하든 그때의 일을 떠올리신다면 나에 대해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할 텐데 싶었지만, 친왕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그 일 이후로 그때의 일을 화제로 삼은 적조차 있지 않던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성뿐만 아니라 우정에 있어서도 성의가 부족한 것 같다는 미움마저 가오루의 마음속에 일었다. 자신이 너무나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타인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 사람을 떠나보낸 뒤의 내 마음은 제의 공주를 하사받게 된 일도 기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나카노키미를 아내로 얻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도 그저 그 사람의 동생이라는 점이 원인이 되어 그 마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매라고는 하나 그 두 여성이 나누었던 사랑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이었고, 임종에 가까워졌을 때도 남겨두는 동생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라 하며, 다른 미련은 없으나 자신이 바랐던 그 혼담에서 제외된 것, 다른 이에게 양보하게 되어 안심할 수 없고 그 결과만을 보기 위해서라도 살고 싶다고 그 사람이 말했었기에, 저세상에서 친왕의 새로운 결혼 소식 등을 알게 된다면 더욱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간절하고 외로운 독수공방하는 밤마다 가오루는 바람 소리에도 잠을 깨어 이런 생각을 하였고, 과거와 미래를 떠올리며 이 세상을 그저 덧없게만 여겼다. 한때의 정으로 애인으로 삼아 여관으로 집에 두고 있는 이들 중에는 자연스럽게 진실한 사랑이 싹틀 법한 사람도 있을 터였으나, 사실 그런 사람도 없었다. 언제나 독신자의 마음 외에는 알지 못했다. 그런 여관 일을 하는 이들 중에는 우지의 공주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신분의 사람도 있었고, 시대의 흐름으로 불행한 처지가 되어 외롭게 지내던 것을 동정하여 집으로 불러들인 부류의 여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과의 교제는 그 정도로만 하고 출가의 목적이 달성될 때 굳이 이 사람이 마음에 걸린다고 생각될 만한 애착을 느낄 사람은 만들지 말자고 깊이 다짐했던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죽은 연인의 혈육인 나카노키미에게 크게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사랑이 아닌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제 처지이면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대로 잠들지 못한 채 날을 밝힌 새벽, 피어오르는 안개 너머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풀꽃의 자태가 보이는 가운데 덧없는 나팔꽃이 섞여 있는 것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인생의 덧없음에 비유되는 꽃이기에 가오루의 마음에 사무치게 보였을 것이다. 초저녁 그대로 아게도(여닫이문)를 올린 채 툇마루 가까운 곳에서 선잠을 자듯 누워 있다가 아침을 맞이했기에, 이 꽃이 피어나는 모습도 오직 혼자 가오루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시종을 불러,
“기타노인으로 찾아가려 하니 간단한 수레를 준비하도록 하라.”
라고 명하고는 복장을 바꾸었다.
외출하려고 정원으로 내려와 가을꽃들 사이에 서 있는 가오루의 모습은, 굳이 요염한 자태를 보이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매혹적이었고, 고귀한 기품까지 갖추어 젠체하는 풍류남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팔꽃을 손으로 가까이 끌어당기자 이슬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오늘 아침의 빛깔을 사랑해야 하리까, 맺힌 이슬이 사라지지 않은 채 걸려 있는 꽃을 보노라면."
“덧없어라.”
등의 혼잣말을 하며 가오루는 꽃을 꺾어 손에 들었다. 마타리꽃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날이 밝아옴에 따라 안개가 짙어진, 운치 있는 기운이 감도는 아래로 니조인으로 향한 가오루는, 친왕께서 부재중이신 날이면 다들 느긋하게 자고 있을 것이고, 격자창이나 덧문을 두드려 기별을 넣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너무 이른 아침에 왔다고 생각하며 시종을 불러 중문의 열린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게 했다.
"격자창이 모두 올라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여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기척이 납니다."
라고 말한다. 가오루가 가마에서 내려 안개 속을 아름답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여관들은 알고, 친왕께서 은밀한 곳에서 돌아오셨나 싶었지만, 이슬에 젖은 공기가 가오루 특유의 향기를 실어오는 통에 누구인지 곧 알아차렸다.
"역시 특별한 분이시네요. 다만 너무 고결한 태도로 계시니 아쉬울 따름이죠."
라고 젊은 여관들이 속삭였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듣기 좋을 정도로 여관들이 옷깃 스치는 소리를 내며 잠자리를 치우는 모습 또한 품격 있게 느껴졌다.
"이곳에 앉아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시니 영광입니다만, 이런 어렴풋한 미스(발) 밖에서 대접받는 신세가 서글퍼 자주 찾아뵐 수가 없습니다."
가오루가 말하자,
"그렇다면 어찌해야 마음이 풀리시겠습니까?"
여관이 이렇게 답했다.
"북쪽 사랑채 같은, 숨겨진 방이 저 같은 옛 인연이 편히 머물기에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부인께서 생각하실 일이니 불평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가오루가 툇마루에서 한 단 높은 장지턱에 상반신을 기대듯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평소의 여관들이,
"조금만 저쪽으로 옮겨 앉으시지요."
라며 부인을 재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