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사이 식사가 시작되었다. 내 접시 옆에는 은박지로 줄기가 감긴 카네이션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현관에서 건네받아 까맣게 잊고 있던 봉투만큼 나를 당혹스럽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역시 낯선 관습이었는데, 남자 손님들이 모두 자기 식기 옆에 놓인 똑같은 카네이션을 집어 들고는 연미복 단추 구멍에 꽂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성당에 온 자유사상가가 미사는 모르더라도 남들이 일어설 때 일어나고 남들이 무릎을 꿇은 뒤에 조금 늦게 따라 꿇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들을 따라 했다. 또 다른 낯설고 덜 일시적인 관습 하나는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다. 내 접시 반대편에는 까맣고 작은 물질이 담긴 더 작은 접시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캐비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베르고트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노르푸아 씨의 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기이한 발성 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에 사유가 담겨 있는 것만큼 그 목소리의 물리적 특성을 변질시키는 것은 없다. 이중 모음의 울림이나 파열음의 에너지가 사유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어조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말투는 글 쓰는 방식과 판이하게 다르게 느껴졌고, 그가 하는 말들도 그의 저작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들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하나의 가면 뒤에서 흘러나오는 법인데, 그 가면은 우리가 문체 속에서 낱낱이 보아온 그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바로 알아채게 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베르고트가 노르푸아 씨에게만 유독 부자연스럽고 거북하게 들리는 방식으로 말하곤 했던 대화의 특정 대목들에서, 나는 그의 문체가 그토록 시적이고 음악적으로 변하던 그의 책 속 대목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점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 그는 자신이 하는 말 속에서 문장의 의미와는 독립된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고 있었고, 인간의 말은 스타일처럼 사유를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영혼과 연관을 맺고 있기에, 베르고트는 마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특정 단어들을 읊조리듯 내뱉었으며, 만약 그 밑에 단 하나의 이미지를 좇고 있다면 그것들을 쉼 없이 연결해 마치 하나의 음조처럼, 지루할 정도로 단조롭게 이어 나갔다. 결국 가식적이고 강조가 심하며 단조로운 말투는 그의 언설이 지닌 미학적 품질의 징표였으며, 그의 책 속에서 이미지의 조화로운 연속을 만들어냈던 바로 그 힘이 대화 속에서 발현된 결과였다. 나는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가 그때그때 했던 말들은 베르고트다운 것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베르고트의 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신문 기자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던 이른바 '베르고트풍'에 포함되지 않은, 정밀한 관념들의 범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는 아마도――그을린 유리 뒤에 있는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대화 속에서 희미하게 비친 것이지만――우리가 베르고트의 페이지를 읽을 때, 그것이 신문이나 책에서 저마다 '베르고트풍'의 이미지와 사유로 자신의 산문을 장식했던 그 수많은 어설픈 모방꾼들 중 누구라도 썼을 법한 글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의 또 다른 단면이었을 것이다. 문체상의 이러한 차이는 '베르고트'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어떤 사물의 핵심 속에 숨겨져 있다가 이 위대한 작가가 자신의 천재성으로 끄집어낸 귀중하고 진실한 요소라는 점, 그리고 그 다정한 노래꾼의 목적은 '베르고트풍'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추출 과정 자체에 있었다는 점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사실 그는 베르고트였기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글을 썼던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 속 모든 새로운 아름다움은 어떤 사물 속에 파묻혀 있다가 그가 끄집어낸 작은 베르고트의 파편이었다. 하지만 비록 그렇게 해서 그 아름다움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것을 드러낸 발견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가 이미 발견하고 집필해 둔 베르고트 작품들의 막연한 합성물에 불과했던, 그래서 천재성이 없는 이들이 그가 어디서 무엇을 발견할지 전혀 예견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베르고트풍'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의 문장이 지닌 아름다움은 아직 알지 못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 자신이 아닌, 생각하고 있는 외부의 대상에 적용되며 아직 표현해 보지 않은 것이기에 창조 그 자체이다. 요즘의 한 회고록 작가가 그다지 티를 내지 않으면서 생시몽풍의 글을 쓰고자 한다면, 빌라르의 초상화 첫 줄인 '그는 꽤 덩치가 큰 갈색 머리의 남자였고……'까지는 겨우 흉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실로 약간 미친 구석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두 번째 줄을 찾아낼 수 있게 하는 필연성이 그에게 어디 있겠는가. 진정한 다양성은 그토록 실제적이고 예상치 못한 요소들로 가득 찬 충만함 속에, 이미 꽉 찬 줄 알았던 봄날의 울타리에서 예상을 뒤엎고 솟아오르는 푸른 꽃이 핀 가지 속에 있는 것이다. 반면 다양성에 대한 순수하게 형식적인 모방(문체의 다른 모든 자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은 공허함과 단조로움, 즉 다양성과 가장 거리가 먼 상태일 뿐이며, 대가들의 문체 속에서 그 진가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밖에는 다양성의 환영을 주거나 그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베르고트의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가 그저 '베르고트풍'을 흉내 내는 아마추어였다면 그의 말투는 분명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그 귀로는 즉각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생생한 관계를 통해 활동 중이고 사유 중인 베르고트의 생각과 얽혀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그 생각을 자신이 좋아하는 현실에 정확히 적용했고,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긍정적이고 과할 정도로 영양가가 넘치는 구석이 있었다. 이는 그가 단지 '영원한 현상의 격류'나 '신비로운 아름다움의 전율'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길 기대했던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다. 더구나 그가 쓴 글의 언제나 희귀하고 새로운 질은 대화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는 문제를 접근할 때 이미 알려진 모든 측면을 무시하는 아주 미묘한 방식을 사용했기에, 마치 문제의 지엽적인 부분만을 건드려 잘못된 방향으로 가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고, 그 결과 그의 생각은 대개 혼란스럽게 여겨졌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혼란과 같은 정도의 혼란 속에 있는 것들만을 명석한 생각이라고 부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새로움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서 현실 그 자체로 여겼던 진부한 관념들을 미리 제거해야 하는 조건이 따르기 때문에, 모든 새로운 대화는 물론이고 모든 회화와 독창적인 음악 또한 언제나 복잡하고 피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형상들에 기초하고 있기에, 화자는 은유로만 말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듣는 이를 지치게 하며 진실성이 결여된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언어의 옛 형식들도 그 형식이 묘사하는 세계를 청자가 아직 알지 못했을 때는 따라가기 어려운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 세계라고 착각하며 그 위에 안주해 왔다.) 그러니 오늘날에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말이지만, 베르고트가 코타르에 대해 '균형을 잡으려는 데카르트 잠수부'와 같다고 하거나, 브리쇼에 대해 '스완 부인보다도 머리 손질에 더 애를 먹는데, 자신의 옆얼굴과 평판을 동시에 신경 쓰느라 머리 모양이 언제나 사자와 철학자의 모습을 동시에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곧 피로를 느끼곤 했고, 더 구체적인 것, 즉 더 익숙한 것으로 발을 돌리고 싶어 했다. 내 눈앞에 있는 가면에서 흘러나온 그 알아볼 수 없는 말들은 분명 내가 존경하던 그 작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말들은 다른 조각들 사이에 끼워 넣는 퍼즐처럼 그의 책 속에 그대로 삽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 존재했고 치환을 필요로 했는데, 훗날 어느 날 내가 베르고트에게 들었던 문장들을 되뇌다가 그 안에서 그의 문체가 가진 전체적인 뼈대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그렇게나 다르게만 들렸던 그 구어체 대화 속에서 나는 그의 문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들을 알아보고 지칭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부차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가 대화 중에 자주 등장하는 특정 단어나 형용사를 발음하는 독특하고 다소 지나치게 세심하며 강렬한 방식은, 모든 음절을 강조하고 마지막 음절을 노래하듯 길게 빼면서 어떤 강조를 곁들여 말하는 것과 일치했는데(그가 항상 '얼굴'이라는 단어 대신 사용하던 '용모'라는 단어의 경우, 그는 거기에 수많은 'v', 's', 'g' 발음을 덧붙였고, 그때마다 그의 벌린 손에서 그 모든 발음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이는 그가 산문 속에서 자신이 아끼는 단어들을 일종의 여백을 앞세워 조명하고 문장 전체의 박자 속에서 완벽하게 배치하여, 읽는 이가 박자를 맞추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그 단어들의 모든 '양'을 헤아리게끔 구성했던 훌륭한 자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베르고트의 언어 속에서는 그의 책이나 다른 몇몇 작가들의 책에서처럼 쓰인 문장 속 단어들의 외관을 종종 변화시키는 특정한 조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아마도 그 조명이 아주 깊은 심연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대화를 통해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어느 정도 우리 자신에게는 닫혀 있게 되는 그 시간까지 그 빛줄기를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책에는 그의 말보다 더 많은 억양과 더 많은 어조가 깃들어 있었다. 문체의 아름다움과는 별개인 이 어조는 작가 자신도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것인데, 그것은 그의 가장 내밀한 인격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고트가 자신의 책 속에서 완전히 자연스러워지는 순간, 그가 썼던 때로는 아주 하찮아 보이는 단어들에 운율을 부여했던 것은 바로 이 어조였다. 이 어조는 텍스트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이를 나타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문장에 스스로 덧붙여져 우리는 문장을 다르게 읽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 작가에게서 가장 덧없으면서도 가장 심오한 것이며, 바로 그것이 그의 본질에 대한 증언이 되어 그가 표현한 모든 냉혹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정했는지, 모든 관능에도 불구하고 그가 감상적이었는지를 말해줄 것이다.
베르고트의 대화에서 희미한 흔적으로나마 존재하던 몇 가지 말투의 특색은 그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의 형제자매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서 훨씬 더 두드러진 형태로 그 특색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즐거운 문장의 끝맺음에서 느껴지는 다소 갑작스럽고 거친 느낌이었으며, 슬픈 문장의 끝에서는 무언가 힘이 빠지고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베르고트가 어렸을 때 그를 알았던 스완은, 당시 그의 형제자매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베르고트에게서도 그러한 일종의 가족적인 억양들, 즉 때로는 격렬한 즐거움의 외침으로, 때로는 느린 우울함의 속삭임으로 변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함께 놀던 방에서 베르고트는 번갈아 터져 나오는 귀청이 터질 듯한 연주와 나른한 연주 속에서 누구보다도 자기 역할을 잘해냈다고 했다. 아무리 독특하다 해도 존재에게서 흘러나오는 이 모든 소리는 덧없는 것이어서 그들의 사후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베르고트 가족의 발음은 그렇지 않았다. 설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조차 예술가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 음악을 창조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베르고트는 기쁨의 함성 속에서 반복되거나 슬픈 한숨 속에서 뚝뚝 떨어지는 단어들을 길게 끄는 그 방식을 자신의 산문 속에 옮겨놓고 고착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책 속에는 오페라 서곡의 마지막 화음처럼 음향의 축적이 길게 이어지는 문장의 끝맺음들이 있는데, 그 곡은 지휘자가 지휘봉을 내려놓기 전까지 끝맺지 못하고 최고의 카덴차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나는 훗날 그 문장들 속에서 베르고트 가족의 그러한 음성적 관악기들과 같은 음악적 등가물을 발견했다. 하지만 정작 베르고트 본인은 그것들을 자신의 책으로 옮겨온 순간부터, 무의식중에 자신의 대화에서는 그것들을 사용하기를 멈추었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날부터, 그리고 내가 그를 알게 된 나중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목소리에서 그러한 조화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베르고트 가문의 이 젊은이들, 곧 훗날의 작가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분명 더 세련되고 재치 있는 젊은이들보다 우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베르고트 집안의 절반은 잘난 척하고 절반은 멍청한 식의 '풍조'를 특징짓는 농담에 짜증을 내며, 그들을 아주 시끄럽고 다소 저속하다고까지 여겼던 더 세련된 젊은이들보다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재성, 아니 위대한 재능조차도 타인보다 우월한 지적 요소나 특별한 세련미에서 오기보다는, 그것들을 변형하고 치환하는 능력에서 온다. 전기 램프로 액체를 데우려면 가장 강력한 램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류가 빛을 내기를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빛 대신 열을 낼 수 있는 램프가 필요하다. 하늘을 날아다니려면 가장 강력한 자동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땅 위를 계속 달리지 않고 자신이 따르던 노선을 수직으로 절단하며 수평 속도를 상승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동차가 필요한 법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가장 섬세한 환경에서 살거나 가장 화려한 대화를 나누며 가장 폭넓은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라, 갑자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인격을 거울처럼 만들 힘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세상적으로나 어느 정도는 지적인 면에서조차 아무리 보잘것없을지라도 그들의 삶이 그 거울에 비치게 하는 것, 즉 천재성이란 비추어지는 대상의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비추어내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젊은 베르고트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취향 나쁜 응접실과 형제들과 나누던 그다지 재미있지 않은 잡담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그날, 그는 자신보다 더 재치 있고 우아했던 가족의 친구들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멋진 롤스로이스를 타고 돌아가면서 베르고트 가문의 저속함을 조금 경멸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마침내 '이륙'한 자신의 소박한 비행체로 그들 위를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다른 특징들은 더 이상 그의 가족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특정 작가들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를 부정하기 시작하며 자신들은 그와 아무런 지적 혈연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조차, 그가 끊임없이 반복하던 부사와 전치사를 사용하고 문장을 같은 방식으로 구성하며, 앞 세대의 유려하고 쉬운 언어에 대한 반작용으로 억제되고 느려진 같은 톤으로 말함으로써 무의식중에 그와의 관계를 드러냈다. 아마도 이 젊은이들 중 몇몇은――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이들을 보게 될 텐데――베르고트를 직접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입된 그의 사고방식은 지적 독창성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는 통사론과 억양의 변화들을 그 안에서 발현시켰다. 그 관계란 또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고트는 자신의 글쓰기 방식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빚진 바 없었으나, 말투만큼은 자신이 그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경이로운 이야기꾼인 옛 동료에게서 물려받았고 대화 속에서 그를 무의식적으로 흉내 냈는데, 정작 그 동료는 재능이 부족해 그만큼 뛰어난 책을 쓴 적이 없었다. 따라서 말투의 독창성만을 두고 본다면 베르고트는 아류이자 이류 작가로 낙인찍혔을 테지만, 대화의 영역에서 친구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작가로서는 독창적이고 창조적이었다. 또한 추상적인 관념이나 거창한 상투어구를 지나치게 좋아했던 이전 세대와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는지, 베르고트는 어떤 책을 좋게 평하고자 할 때 그것을 돋보이게 하거나 인용하는 것은 늘 이미지를 형성하는 어떤 장면이나 합리적인 의미가 없는 어떤 그림이었다. "아! 그래! 그건 참 좋아! 오렌지색 숄을 두른 어린 소녀가 있잖아, 아! 그건 참 좋아." 또는 이런 식이었다. "오! 그래, 연대가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목이 있어, 아! 그래, 그건 참 좋아!" 문체에 관해서라면 그는 자기 시대의 사람과는 거리가 좀 있었고(그는 애초에 철저히 자기 나라의 사람으로 남았으며, 톨스토이, 조지 엘리엇, 입센, 도스토옙스키를 혐오했다), 그가 문체를 찬양하고 싶을 때면 늘 되풀이하던 단어는 '부드러운'이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나는 『르네』보다는 샤토브리앙의 『아탈라』가 더 좋아, 그게 더 부드러운 것 같거든." 그는 환자가 우유 때문에 위가 아프다고 호소하면 의사가 "그래도 이건 아주 부드러운 거예요."라고 대답하듯 그 단어를 말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베르고트의 문체에는 고대인들이 그들의 웅변가들에게 보냈던, 오늘날 현대 언어에서 그러한 효과를 추구하지 않는 우리로서는 그 본질을 이해하기 힘든 찬사와 같은 일종의 조화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또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생각엔 꽤 진실하고, 꽤 정확한 것 같아.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그저 겸손함에서 비롯된 말이었으니, 마치 누군가 옷이나 딸이 아름답다고 칭찬했을 때 첫 번째 경우엔 "이 옷은 입기 편해요"라고, 두 번째 경우엔 "아이는 성격이 좋아요"라고 답하는 여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베르고트에게 있어 창조자로서의 본능은 너무나 깊었기에, 자신이 유용하고 진실하게 구축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 그다음엔 타인에게 그 작품이 주었던 기쁨에 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흘러 더 이상 재능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만족스럽지 못한 글을 쓸 때마다 마땅히 지워버려야 했음에도 출판을 강행하며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꽤 정확해. 내 조국에 무용지물은 아닐 거야." 그리하여 과거 겸손이라는 술책으로 독자들 앞에서 나직이 읊조렸던 그 문장은, 결국엔 자존심의 불안함 때문에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나직이 울리게 되었다. 베르고트의 초기 작품들에 대해 불필요한 변명으로 쓰였던 바로 그 말들이, 마지막 작품들의 평범함을 위로하는 무력한 위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가졌던 일종의 취향의 엄격함, 즉 "달콤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글만을 쓰겠다는 의지는, 그를 수년 동안 불임의 예술가이자 가식적인 사람, 하찮은 것을 다듬는 조각가로 보이게 했지만, 사실은 그의 힘의 원천이었다. 왜냐하면 습관은 인간의 성격뿐만 아니라 작가의 문체도 형성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일정한 안락함에 안주하는 것에 여러 번 만족해버린 작가는 그렇게 영원히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긋기 때문이다. 그것은 쾌락이나 나태함,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자주 굴복함으로써 결국 다시 수정할 수 없는 성격 위에 자신의 악덕과 미덕의 한계를 스스로 그려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작가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일치점을 훗날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완 부인 댁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가 베르고트라는 것, 그토록 수많은 신성한 책들을 쓴 작가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던 것이 혹시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그 자신조차도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못한 사교계 인사들(그렇다고 속물은 아니었지만)이나 문인, 기자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으니 결코 그것을 믿고 있었던 게 아니다. 물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사교계의 지위나 공식적인 직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카데미 회원 자리를 얻기 위해 삼류 작가들에게 굽실거리는 척을 계속했으니 정작 그것을 믿지는 않았다. 아카데미나 생제르맹가(街)가 베르고트의 책들을 쓴 영원한 정신의 일부와 관련이 있는 정도는, 기껏해야 인과율의 원칙이나 신의 관념과 관련이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는 도벽이 있는 사람이 훔치는 것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듯, 그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달팽이 모양의 코와 염소 수염을 기른 그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아카데미 회원 자리에 다가가기 위해, 선거에서 몇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어느 공작 부인에게 접근하려고 점잖은 도둑처럼 꾀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부도덕하게 여길 만한 사람이 자신의 수작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접근했다. 그는 반쯤만 성공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진짜 베르고트의 말과,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권력자나 귀족, 부자들에 대해서만 말하려 드는 이기적이고 야심만만한 베르고트의 말이 교차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정작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정말로 자기 자신일 때면 가난한 이들의 매력을 샘물처럼 순수하게 그토록 잘 보여주었던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노르푸아 씨가 언급했던 다른 악덕들, 심지어 금전적인 면에서의 부도덕함까지 얽혀 있다고들 했던 그 반(半)근친상간적인 사랑에 관하여 말하자면, 비록 그것들이 그의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경향과는 충격적일 정도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의 최근 소설들은 선(善)에 대한 지나치게 꼼꼼하고 고통스러운 배려로 가득 차 있어서, 주인공들의 아주 사소한 기쁨조차 그로 인해 오염되고, 독자에게조차 가장 달콤한 삶조차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베르고트에게 그런 악덕들이 정당하게 귀속된다고 가정할지언정, 그것이 그의 문학이 거짓이며 그 모든 감수성이 연극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병리학에서 외견상 비슷한 상태가 긴장이나 분비 등의 과다 또는 부족 때문에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수성 부족에서 오는 악덕이 있듯이 과잉 감수성에서 오는 악덕도 있을 수 있다. 아마도 도덕적 문제는 실제로 타락한 삶 속에서만 그 불안의 무게를 온전히 안고 제기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차원이 아니라, 그에게 진정한 삶인 일반적이고 문학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이 종종 선한 인물이었음에도 모든 인간의 죄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로부터 자신의 성스러움을 끌어냈듯이, 위대한 예술가들 또한 악한 인물임에도 자신의 악덕을 이용해 만인의 도덕적 규범을 구상해내곤 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비난 속에서 가장 자주 혹평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살았던 환경의 악덕(혹은 단지 약점이나 우스꽝스러움),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 딸의 경박하고 충격적인 삶, 아내의 배신 혹은 그들 자신의 과오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기 가정의 생활 방식이나 집안에 만연한 저질스러운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조는 베르고트 시대보다 과거에는 덜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사회가 타락해감에 따라 도덕 관념이 더 정화되어 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작가들의 사생활에 대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밤 극장에서, 사람들은 콩브레 시절 내가 그토록 존경했던 작가가 극장 관람석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모습을 가리키곤 했다. 그 관람석의 구성 자체가 그가 최근 작품에서 주장했던 주제에 대해 기묘하게 우스꽝스럽거나 가슴 아픈 논평처럼, 혹은 그 주제를 뻔뻔스럽게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베르고트의 선함이나 악함에 대해 나에게 큰 정보를 준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말들이 아니었다. 그의 가까운 지인들은 그가 냉혹했다는 증거들을 대기도 했고, 어떤 낯선 이는 그의 깊은 감수성을 보여주는(분명히 숨겨져 있기를 바랐을 것이기에 더 가슴 뭉클한)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아내에게 잔인하게 대했다. 하지만 하룻밤 묵으러 들렀던 어느 시골 여관에서 그는 물에 뛰어들려던 불쌍한 여인을 밤새 간호했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그 불행한 여인을 내쫓지 말고 잘 돌봐달라며 여관 주인에게 많은 돈을 남겨두었다. 아마도 염소 수염을 기른 남자라는 측면을 대신하여 베르고트라는 위대한 작가로서의 면모가 성장할수록, 그의 개인적인 삶은 그가 상상하는 수많은 삶의 홍수 속에 빠져들었고, 그에게 현실적인 의무를 지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을 것이며, 그 의무들은 그에게 있어 다른 삶들을 상상해야 하는 의무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타인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잘 상상할 수 있었기에, 어쩌다 한번 불행한 사람을 대해야 할 기회가 생기면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의 관점에서 그를 대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자신의 사소한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들의 언사가 그런 관점에서는 끔찍하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변에 정당한 원한과 잊을 수 없는 감사를 동시에 남겼다.
그는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는 특정한 이미지들만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마치 보석함 밑바닥에 든 미니어처처럼 그 이미지들을 단어 아래에 구성하고 그려내는 것만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사소한 것을 보내주었을 때, 그것이 그에게 그런 이미지들을 몇 개 엮어낼 기회가 된다면 그는 자신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 아낌이 없었지만, 귀한 선물을 받았을 때는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그는 본의 아니게 판사에게 미칠 영향이 아니라 판사가 결코 알아채지 못할 이미지들을 염두에 두고 말을 골랐을 것이다.
질베르트의 부모님 댁에서 그를 처음 본 그날, 나는 베르고트에게 최근에 『페드르』에 출연한 베르마의 연기를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녀가 어깨 높이까지 팔을 치켜든 채 머무르는 장면, 정확히는 관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던 장면 중 하나에서, 그녀가 어쩌면 한 번도 본 적 없을 명작들, 즉 올림피아의 메토페에서 같은 동작을 취하는 헤스페리데스나 고대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아름다운 처녀상들을 아주 고귀한 예술로 불러낼 줄 알았다고 말했다.
"예지력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녀가 박물관에 다닌다고 생각하네. '발견'해보면 흥미로울 거야."('발견하다'는 베르고트가 평소 즐겨 쓰던 표현 중 하나였는데, 그를 만나본 적도 없는 젊은이들이 일종의 원격 암시를 통해 그처럼 말하며 이 표현을 가져다 쓰곤 했다.)
"카리아티데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스완이 물었다.
"아니, 아닐세." 베르고트가 말했다. "오노네에게 자신의 열정을 고백하며 케라메이코스의 비석에 있는 헤게소의 손동작을 취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그녀가 되살려내는 것은 훨씬 더 고대의 예술이라네. 내가 말한 건 고대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코라이상들이었어. 물론 라신의 예술과는 이보다 더 멀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페드르』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이 담겨 있으니…… 하나쯤 더 있다고 한들…… 오! 그리고 말이지, 6세기의 작은 페드르상도 아주 예쁘지. 팔의 수직성이나 '대리석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의 곡선까지, 그래, 어쨌든 그 모든 것을 찾아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올해 '고대적'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책들보다 그쪽에 훨씬 더 많은 고대성이 깃들어 있지."
베르고트가 자신의 책 중 한 권에서 이 고대 조각상들에 유명한 찬사를 바친 적이 있었기에, 그가 지금 내뱉는 말들은 내게 아주 명확하게 들렸고 베르마의 연기에 관심을 가질 새로운 이유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베르마가 어깨 높이까지 팔을 치켜들었던 그 장면에서의 그녀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올려보려 애썼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것이 올림피아의 헤스페리데스구나. 저것이 아크로폴리스의 그 훌륭한 기도하는 처녀상들 중 하나의 자매구나. 저것이 바로 고귀한 예술이라는 것이구나.'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베르마의 몸짓을 내게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면, 베르고트가 공연 전에 미리 내게 그런 관점을 제공했어야만 했다. 배우의 그 자세가 실제로 내 눈앞에 존재하던 그때, 즉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직 현실의 충만함을 지니고 있던 그 순간에 나는 그것으로부터 고대 조각의 아이디어를 추출해내려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 속 베르마의 모습에 대해 내가 간직하고 있던 것은 더는 수정할 수 없는 기억이었고, 깊이 파고들어 그로부터 진실하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현재의 깊은 이면이 결여된, 그저 얇은 이미지에 불과했다. 그것은 더 이상 검증이나 객관적인 인정을 받을 수 없는 해석을 소급하여 덧씌울 수 없는 이미지였다. 대화에 끼어들며 스완 부인은 내게 질베르트가 베르고트가 쓴 『페드르』에 관한 글을 나에게 건네주었는지 물었다. "내 딸은 정말 덜렁거린다니까요." 그녀가 덧붙였다. 베르고트는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글일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 작은 소책자, 그 작은 논문은 정말 매력적이에요." 스완 부인은 훌륭한 안주인으로 보이기 위해, 그 소책자를 읽었다고 믿게 하기 위해, 그리고 단순히 베르고트를 칭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쓴 것들 중에서 직접 선택하고 그를 이끌고 싶어 했기에 그렇게 말했다. 사실 그녀는 베르고트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스완 부인 응접실의 우아함과 베르고트 작품의 한 측면 사이에는 오늘날의 노인들에게 서로가 번갈아 가며 주석이 되어줄 수 있을 만한 관계가 존재한다.
나는 내 인상을 털어놓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베르고트는 종종 내 생각이 옳지 않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페드르가 팔을 치켜드는 순간의 그 초록빛 조명이 좋았다고 말했다. "아! 그 무대 미술가는 정말 위대한 예술가라네. 그 조명을 아주 자랑스러워하니 자네가 한 말을 꼭 전해주어야겠군. 나는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네만. 모든 것을 음침한 기계 장치 속에 잠기게 해서, 그 속의 작은 페드르가 마치 어항 바닥에 있는 산호 가지처럼 보이더군. 극의 우주적인 측면을 부각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건 사실이야. 그래도 넵튠의 궁전에서 벌어지는 연극이라면 몰라도 말일세. 넵튠의 복수가 담겨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맙소사, 나는 사람들이 오직 포르루아얄만 생각하길 바라는 건 아니네만, 그래도 라신이 이야기한 건 성게들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내 친구가 원했던 바이고, 꽤 강력한 연출인 데다 본질적으로는 꽤 예쁘긴 하군. 그래, 자네는 그것을 좋아했고 이해했지, 그렇지 않나? 본질적으로 우리 생각은 같네. 그 친구가 한 짓은 좀 황당하지, 그렇지 않나? 하지만 아주 지적인 시도이기도 하지." 베르고트의 의견이 내 생각과 다를 때에도 그는 노르푸아 씨처럼 나를 침묵하게 하거나 아무 대꾸도 할 수 없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것은 베르고트의 의견이 대사의 의견보다 덜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강한 사상은 대립하는 상대에게 그 힘의 일부를 전달한다. 정신의 보편적 가치에 참여하는 사상은 반박당하는 사람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 인접한 사상들 사이에 접붙여진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다시 우위를 점하며 그 사상을 보완하고 교정하게 되니, 최종적인 결론은 사실상 논쟁하던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 되는 셈이다. 상대방의 정신 속에서 아무런 지지점도, 형제 같은 가지도 찾지 못하고 그저 허공을 맴도는 사상들, 즉 엄밀히 말해 사상이 아닌 것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대꾸할 수가 없는 법이다. 노르푸아 씨의 예술에 관한 주장들은 아무런 실체가 없었기에 반박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베르고트가 내 반론을 일축하지 않기에, 나는 그에게 노르푸아 씨가 그것들을 경멸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늙은 바보라네." 그가 대답했다. "그가 자네를 쪼아댄 건 언제나 자기 앞에 데인 놈이나 오징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뭐라고요! 노르푸아를 아세요?" 스완이 내게 말했다. "오! 그는 비 오듯 지루한 사람이에요." 스완 부인이 말을 가로챘다. 그녀는 베르고트의 판단을 굳게 믿었으며, 노르푸아 씨가 우리에게 그녀에 대한 험담을 했을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저녁 식사 후에 그와 이야기를 좀 나누려 했는데, 노망이 든 건지 소화가 안 되는 건지 정말 흐리멍덩하더군요. 도핑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요, 정말 그렇지 않나요?" 베르고트가 말했다. "그는 저녁이 다 가기도 전에 셔츠 깃을 빳빳하게 채우고 흰 조끼를 받치고 있는 그 멍청한 소리들을 다 쏟아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주 입을 다물어야 하죠." "난 베르고트와 우리 아내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네." 상식적인 사람의 '역할'을 자처하던 스완이 말했다. "노르푸아가 자네에게 큰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스완은 '삶'의 묘미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그는 '연인'으로서 꽤 흥미로운 인물이지. 그가 로마의 서기관으로 있을 때," 질베르트가 듣지 못할 것임을 확인한 뒤 그가 덧붙였다. "파리에 끔찍이 사랑하던 정부가 있었는데, 그는 이틀에 한 번씩 여행을 해서 두 시간씩 그녀를 만나는 방법을 찾아냈어. 어쨌든 그 당시엔 매우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지, 지금은 미망인이 되었지만 말이야. 그사이 그는 다른 여자도 많이 만났고. 나라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파리에 살고 내가 로마에 묶여 있다면 미쳐버렸을 거야.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은 민중이 말하듯 항상 '자기보다 아래 계급의' 사람을 사랑해서 이해관계가 사랑하는 여인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해." 이 순간 스완은 내가 이 격언을 그와 오데트에게 적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뛰어난 인물들조차 당신과 함께 삶을 초월해 떠다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자존심은 여전히 좀스럽기에, 그는 나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눈빛 속에 담긴 불안으로만 나타났을 뿐이었다. 그는 그 순간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너무 놀라워할 필요는 없다. 라신이, 비록 근거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파리 생활에서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소재인 그 일화에 따라 루이 14세 앞에서 스카롱을 언급했을 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인 그는 그날 저녁 시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총애를 잃고 추락한 것은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이론은 온전히 표현되기를 바라는 법이라, 스완은 1분간의 짜증이 지난 뒤 단안경의 렌즈를 닦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훗날 내 기억 속에서 예언적인 경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으나 내가 귀담아듣지 않았던 그 말은 이러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사랑이 위험한 이유는 여성을 예속시킴으로써 남자의 질투를 잠시 잠재울 수는 있어도, 오히려 남자를 더욱 까다롭게 만들기 때문이지. 남자는 결국 자기 정부를 더 철저히 감시하려고 밤낮으로 불을 밝혀두는 죄수처럼 살게 하거든. 그리고 결국 그런 사랑은 대개 비극으로 끝나고 말지."
나는 노르푸아 씨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 사람을 믿지 마세요. 오히려 아주 험담을 잘하는 사람이라니까요." 스완 부인이 그렇게 말했는데, 그 어조가 노르푸아 씨가 그녀에 대해 험담을 했다는 사실을 더욱 짙게 풍기는 것 같아 스완은 아내를 꾸짖는 듯한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하려는 듯 쳐다보았다.
외출 준비를 하러 가라고 벌써 두 번이나 재촉을 받았음에도 질베르트는 여전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남아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어깨에 애교 섞인 몸짓으로 기대어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는 검은 머리의 스완 부인과 붉은 머리에 황금빛 피부를 가진 이 소녀만큼 대조적인 존재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는 질베르트에게서 어머니의 표현이나 몸짓 같은 많은 특징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여러 세대에 걸쳐 조각칼을 놀리는 보이지 않는 조각가가 갑작스럽고도 틀림없이 정확한 솜씨로 다듬어놓은 코 같은 것이 그러했다. 다른 예술 분야에 비유하자면, 그녀는 스완 부인의 초상화이기는 한데 아직은 별로 닮지 않은, 화가가 색채 화가로서의 변덕을 부려 베네치아인 복장을 하고 '가면무도회'에 갈 준비를 하느라 반쯤 변장을 시켜놓은 모습 같았다. 또한 그녀는 단순히 금발 가발을 쓴 것이 아니었으며, 어두운 원소는 모두 몸에서 빠져나가 갈색 베일을 벗어던진 살결은 더욱 맨살처럼 드러나 보였고 오로지 내면의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로만 뒤덮여 있어서, 그 분장은 단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살 속에 구현된 것이었다. 질베르트는 마치 어떤 신화 속 동물을 연기하거나 신화적 의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이 붉은 피부는 아버지의 것이어서, 자연은 질베르트를 창조할 때 오직 스완 씨의 피부라는 재료만을 가지고 조금씩 스완 부인을 다시 만들어내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것 같다. 자연은 마치 나무의 나뭇결과 옹이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숙련된 가구 장인처럼 그 재료를 완벽하게 사용했다. 질베르트의 얼굴에서 오데트의 코끝은 완벽하게 재현되었지만, 그 피부는 스완 씨의 점 두 개를 온전히 간직하기 위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그렇게 보랏빛 라일락 옆의 하얀 라일락처럼 스완 부인의 새로운 변종이 그녀 곁에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닮음 사이의 경계선이 아주 뚜렷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질베르트가 웃을 때면, 마치 두 사람의 얼굴을 합쳐서 그 혼합이 어떤 결과물을 낼지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머니의 얼굴 속에서 아버지의 뺨 윤곽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 윤곽은 배아가 형성되듯 뚜렷해졌다가 비스듬히 길어지고 부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곤 했다. 질베르트의 눈에는 아버지의 착하고 솔직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내게 마노 구슬을 주며 "우리 우정의 증표로 간직해."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지었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 하지만 질베르트에게 무엇을 했는지 질문을 던지면, 오데트가 스완에게 어디에 다녀왔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당혹감, 불확실함, 속임수, 그리고 슬픔이 그 똑같은 눈동자 속에서 보였고, 그때 오데트가 늘어놓던 거짓 답변들은 연인이었던 스완을 절망케 했으며 지금은 남편인 그로 하여금 호기심 없고 조심스러운 남편이 되어 화제를 급히 돌리게 만들었다. 종종 샹젤리제에서 나는 질베르트에게서 그런 눈빛을 보며 불안해지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기우였다. 어머니의 육체적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녀에게 있어 그 시선은, 적어도 그만큼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베르트의 눈동자가 오데트의 눈에서처럼 낮 동안 정부를 만났거나 데이트를 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두려워하던 옛날의 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수업에 갔을 때나 수업을 위해 돌아와야 할 때뿐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이 멜뤼진의 몸속에서 스완 씨와 스완 부인이라는 두 천성이 번갈아 가며 출렁이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서로를 침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아이가 부모를 닮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물려받는 장단점의 분배는 너무나 기묘하게 이루어져서, 부모 중 한쪽에게서는 분리될 수 없어 보이던 두 가지 자질이 아이에게서는 오직 하나만 나타나고, 그마저도 그것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던 다른 부모의 단점과 결합되곤 한다. 심지어 도덕적 자질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 신체적 결함 속에 구현되는 것조차 자식이 부모를 닮는 법칙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 두 자매가 있다면, 한 명은 아버지의 당당한 체격에 어머니의 속 좁은 성격을 가질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의 지성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의 외양으로 세상에 그것을 드러낼 것이다. 커다란 코와 불룩한 배,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원래는 훌륭한 모습으로 알려졌던 재능의 옷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두 자매 중 누구를 보더라도 저마다 부모의 이런저런 면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질베르트가 외동딸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두 명의 질베르트가 존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가지 천성은 그녀 안에서 단순히 섞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그녀를 차지하려 다투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부정확할뿐더러 제3의 질베르트가 그동안 두 존재의 먹잇감이 되어 고통받고 있었다는 가정까지 낳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질베르트는 번갈아 가며 한쪽이었다가 다시 다른 쪽이었고, 매 순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즉, 그녀가 더 나쁜 상태일 때는 스스로 고통을 느낄 수 없었고, 더 좋은 질베르트는 그때 잠시 부재중이었으므로 그런 타락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둘 중 더 못한 쪽은 고결하지 못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다른 쪽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는 그녀의 생각도 원대해서, 함께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도모하고 싶어 그것을 제안하려 하면, 결론을 내리려는 바로 그 순간 어머니의 마음이 이미 자기 차례를 되찾아 여러분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실망하고 짜치게 되는데,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질베르트가 그때 그 자신의 모습에서 우러나온 속 좁은 생각과 비열한 비웃음에 스스로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때로는 두 질베르트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커서,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었는지, 물론 헛된 의문이긴 하지만, 스스로 묻게 될 정도였다. 그녀가 제안했던 약속에 그녀가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사과조차 하지 않았을 때, 설령 무엇이 그녀의 결심을 바꾸게 만들었든 간에, 그 후의 그녀는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마치 '메네크미'의 핵심을 이루는 것과 같은 닮음의 희생양이 된 것처럼, 당신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만나자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해명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불쾌한 기색을 당신에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자, 어서 가. 우리 기다리게 만들 셈이니?" 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빠 곁에 있으니 너무 좋아요. 조금만 더 있다 갈래요." 질베르트는 아버지의 팔 아래로 머리를 파묻으며 대답했고, 아버지는 부드럽게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넘겼다.
스완은 사랑의 환상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며, 자신이 수많은 여인에게 베푼 안락함이 정작 그들로부터 자신을 향한 어떤 감사나 다정함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그들의 행복만을 증진시켰음을 목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자식에게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에 화신(化身)된, 자신들이 죽은 뒤에도 자신들을 지속시켜 줄 애정을 느낀다고 믿는다. 샤를 스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도, 스완 양이나 혹은 스완 가(家) 출신의 어느 부인이 여전히 사라진 아버지를 계속 사랑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사랑이 너무 과할지도 모른다고 스완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질베르트에게 "넌 참 착한 아이구나"라고 말했는데, 그 말투에는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존재의 너무나 열정적인 다정함이 미래를 향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걱정 섞인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감정을 숨기기 위해 그는 우리가 나누던 베르마에 관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하는 말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싶다는 듯, 무관심하고 지루한 어조로 배우가 오노네에게 "당신은 알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얼마나 지적이고 예기치 못한 정확함을 보여주는지 지적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적어도 그 억양만큼은 진정으로 이해 가능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 베르마를 찬양할 반박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싶었던 나의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명확함 때문에 그것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 억양은 너무나 재기 넘치고 의도와 의미가 분명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영리한 배우라면 누구나 터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훌륭한 아이디어였지만, 그처럼 온전히 구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똑같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베르마에게 남은 것은 그녀가 그것을 '찾아냈다'는 사실뿐이었지만, 만약 그것을 단순히 전달받았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무언가를,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이후에 재현할 수 있기에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와는 결부되지 않은 무언가를 두고 '찾아냈다'는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맙소사, 당신이 함께하니 대화 수준이 정말 높아지는군요!" 게르망트 가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위대한 예술가들을 그저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 게임을 같이 즐기거나 시골에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함께 즐기려 애쓰는 좋은 친구처럼 대하는 버릇이 든 스완이 베르고트에게 사과라도 하듯 내게 말했다. "우리는 예술에 관해 아주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군." 그가 덧붙였다. "정말 좋네요, 저도 아주 좋아요." 스완 부인이 친절함에서, 그리고 더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던 옛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내게 고마움이 담긴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그다음에는 베르고트가 다른 사람들, 특히 질베르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놀라울 정도로 자유롭게 털어놓았는데, 그것은 수년 동안(그가 나에게 내 자아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었던 그 수많은 고독과 독서의 시간 동안) 그와 함께하며 진실함과 솔직함, 그리고 신뢰를 쌓아온 덕분에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람보다 그가 덜 위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같은 이유로 나는 그에게 내가 남겼을 인상에 대해 몹시 불안했다. 내가 내 생각들에 대해 그가 가졌으리라 짐작한 경멸은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콩브레의 우리 정원에서 그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던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내 생각에 온전히 몸을 맡긴 채 베르고트의 작품에 깊이 공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장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으니, 나를 이끌었던 이 두 가지 본능적인 움직임은 서로 아주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법칙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내가 책을 통해 사랑했던 그 베르고트의 정신은 나의 실망감이나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나의 무능함에 전적으로 낯설거나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지성은 하나여야 했고, 어쩌면 모두가 공동으로 거주하는 단 하나의 지성만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극장에서 각자 자기 자리는 따로 있지만 무대는 하나뿐인 것처럼, 모두가 자신의 특정한 신체 깊은 곳에서 그 지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파헤치고 싶어 했던 생각들은 베르고트가 평소 자신의 책에서 깊이 있게 다루던 것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나와 그가 같은 지성을 활용하고 있었다면, 그가 내 말을 들으며 그것을 떠올리고, 사랑하고, 미소 지었을 것이며,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내면의 눈앞에는 그의 책에 일부분이나마 담겼고 내가 그의 정신세계 전체를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지성의 영역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을 것이다. 사제들이 인간의 마음을 가장 깊이 경험했기에 자신들은 저지르지 않는 죄를 가장 잘 용서할 수 있듯이, 천재는 지성을 가장 깊이 경험했기에 자신의 작품 근간을 이루는 사상들과 가장 대립하는 사상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말했어야 했다(사실 이는 그리 유쾌한 생각은 아니다. 고매한 정신의 자애로움은 범인들의 몰이해와 적대감을 결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책에서 어찌어찌 찾아낸 위대한 작가의 친절함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지성 때문에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적대감에서 겪는 고통을 훨씬 더 크게 느끼는 법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말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질베르트가 내 귀에 속삭였을 때 나는 그저 내가 베르고트에게 바보처럼 보였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어. 네가 나의 위대한 친구 베르고트의 마음을 사로잡았거든. 그가 엄마에게 네가 무척 똑똑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어.”
“우리 어디로 갈까?” 나는 질베르트에게 물었다.
“오!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해. 알다시피 난 여기든 저기든 상관없어…….”
하지만 할아버지 기일 날 있었던 사건 이후로, 나는 질베르트의 성격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 않은지, 그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와 그 사려 깊음, 침착함, 그리고 지속되는 부드러운 순종이 사실은 자존심 때문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던 아주 열정적인 욕망들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들이 우연히 좌절될 때만 갑작스러운 저항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베르고트가 우리 부모님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에 우리는 함께 출발했다. 차 안에서 그가 내 건강에 대해 말했다. “우리 친구들이 자네가 아프다고 하더군. 정말 안됐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네를 너무 동정하지는 않아. 왜냐하면 자네는 분명 지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
아! 그가 한 말이 나에게는 얼마나 사실이 아닌지, 나는 얼마나 절실히 느꼈던가. 아무리 고상한 추론이라 할지라도, 그저 빈둥거리는 순간의 안락함을 느낄 때 외에는 행복을 모르던 나에게는 냉랭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얼마나 순수하게 물질적인 것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지적인 활동 따위는 접어두고 살 수 있었는지 느꼈다. 즐거움의 원천이 얼마나 깊고 지속적인가에 따라 그것들을 구분하지 못했던 나는, 그에게 대답하려는 순간, 게르망트 공작부인과 맺어지는 삶, 그리고 샹젤리제의 옛 입세 사무소에서 느꼈던 것처럼 콩브레를 떠올리게 하는 신선함을 자주 느끼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감히 그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그 이상적인 삶 속에는 지적인 즐거움이 차지할 자리는 전혀 없었다.
“아니요, 선생님. 지적인 즐거움은 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제가 그것을 맛본 적이라도 있는지조차 모르겠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가 대답했다. “음, 잘 들어보게. 그래도 자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분명 그것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내 생각은 그래.”
그가 나를 설득한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더 행복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노르푸아 씨가 내게 했던 말 때문에 나는 그동안 나의 공상과 열정, 그리고 자신감의 순간들을 순전히 주관적이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왔었다. 하지만 내 경우를 잘 아는 듯한 베르고트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내가 무시해야 할 징후는 나의 의심과 자기 혐오인 듯했다. 무엇보다 노르푸아 씨에 대해 그가 한 말은, 내가 그동안 거부할 수 없는 판결이라 믿어왔던 비판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치료는 잘 받고 있나?" 베르고트가 내게 물었다. "누가 자네 건강을 돌봐주나?" 나는 코타르를 이미 진찰받았고 아마 다시 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자네에게 필요한 의사가 아니야!" 그가 내게 대답했다. "나는 그를 의사로서 잘 알지는 못하네. 하지만 스완 부인 댁에서 본 적이 있지. 그는 멍청이야. 그것이 유능한 의사가 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예술가나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의사가 되는 데는 분명 방해가 되네. 자네 같은 사람들은 적절한 의사가 필요하며, 거의 식이요법이나 특별한 약 처방까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군. 코타르는 자네를 지루하게 할 것이고, 그 지루함만으로도 그의 치료는 효과를 보지 못할 걸세. 게다가 그런 치료가 일반 사람들과 자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지. 지적인 사람들의 질병은 4분의 3이 그들의 지성에서 비롯되는 법이야. 그들에게는 최소한 그 병을 이해하는 의사가 필요하다네. 코타르가 어떻게 자네를 치료할 수 있겠나. 그는 소스를 소화하기 어렵거나 위장이 불편한 것은 예상했겠지만,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은 예상하지 못했거든……. 그러니 자네에 대한 그의 계산은 더 이상 맞지 않고 균형은 깨져서, 늘 작은 잠수부가 위로 떠오르고 마는 꼴이지. 그는 자네에게 위확장증이 있다고 진단할 거야. 진찰할 필요도 없지. 이미 그의 눈에 답이 있으니까. 자네도 볼 수 있을걸, 그의 단안경에 비치거든." 이런 식의 대화는 나를 몹시 피곤하게 했고, 나는 상식의 둔함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코타르 교수의 단안경에 위확장증이 비치는 일 따위는 노르푸아 씨의 하얀 조끼 속에 어리석음이 숨겨져 있는 것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뒤 불봉 박사를 추천하겠네." 베르고트가 말을 이었다. "그는 꽤 지적인 사람이거든." "그분은 선생님 작품의 열렬한 애독자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베르고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을 알았고, 동질감을 느끼는 정신은 빠르게 하나로 모이며, 우리가 진정한 '알지 못하는 친구'를 갖는 일은 드물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타르에 관해 베르고트가 한 말은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과 반대되었기에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내 주치의가 지루하다는 사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법칙을 알 수 없는 어떤 기술을 통해 내 내장을 살피고 건강에 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신탁을 내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대신할 수도 있었을 지성으로 나의 지성을 이해하려 애쓰는 일 따위는 원치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지성을 그저 외부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 자체로는 무관한 수단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지적인 사람들이 멍청이들과 다른 위생 관리가 필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의 방식에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좋은 의사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우리 친구 스완일세." 베르고트가 말했다. 그가 아프냐고 내가 묻자 그는 대답했다. "글쎄, 그는 자기 아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여자들이나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가졌던 남자들에게서 매일같이 수모를 당하는 여자와 결혼한 남자라네. 우리는 볼 수 있지, 그것들이 그의 입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을. 언젠가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누가 와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의 눈썹이 원호처럼 치켜 올라가는 것을 한번 보게나." 베르고트가 오랫동안 식객으로 드나들던 친구들에 대해 낯선 사람인 나에게 그토록 악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스완 부부에게 순간순간 보였던 거의 다정한 말투만큼이나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예를 들어 우리 큰이모 같은 분이라면 우리 중 누구에게도 베르고트가 스완에게 아낌없이 쏟아붓던 그런 친절함은 베풀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불쾌한 말을 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그들이 없는 곳에서는 그들이 들을 수 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콩브레의 사교계만큼 '사교계'와 닮지 않은 것도 없었다. 스완 부부의 사교계는 이미 그곳을 향한, 그 변덕스러운 파도를 향한 길목이었다. 아직 큰 바다는 아니었지만, 이미 석호였던 셈이다. "이건 자네와 나 사이의 이야기일세." 내 집 앞을 떠나며 베르고트가 말했다. 몇 년 후였다면 나는 그에게 "전 절대 아무 말도 옮기지 않습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것은 사교계 사람들이 쓰는 의례적인 문구로, 험담하는 이들을 매번 거짓으로 안심시키는 말이다. 사회적 인물로서 행동하는 순간에는 특히, 말하는 모든 것을 지어낼 수는 없기에 나도 그날 바로 베르고트에게 그 말을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문구를 알지 못했다. 한편, 그런 상황에서 우리 큰이모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옮겨지길 원치 않으면 왜 그런 말을 하니?" 그것은 사교성이 없는, '고집불통'들의 대답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기에,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는 대단한 인물들로 보였던 문인들이 베르고트와 관계를 맺기 위해 수년간 애를 쓰며 공작을 벌여도 결국 그의 집무실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문학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반면, 나는 그 위대한 작가의 친구들 사이에 곧바로,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마치 모두가 나쁜 자리를 차지하려고 줄을 설 때, 남들은 들어갈 수 없는 통로를 거쳐 가장 좋은 자리를 얻어낸 사람처럼 말이다. 스완이 나에게 그렇게 통로를 열어주었던 것은, 아마도 왕이 자기 아이들의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왕실 전용석이나 왕실 요트에 초대하는 것처럼, 질베르트의 부모 역시 자신들이 가진 귀중한 물건들과 그 속에 액자처럼 담긴 더 귀중한 친분들 한가운데로 딸의 친구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아마도 일리 있는 생각이었겠지만, 스완의 이러한 친절이 간접적으로는 나의 부모님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콩브레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스완은 내가 베르고트에 대해 가진 경외심을 보고 나를 자기 집으로 저녁 식사에 데려가겠다고 제안했으나, 부모님은 내가 아직 너무 어리고 신경이 예민해 '외출'하기에는 부적절하다며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았음에도, 내가 보기에 가장 경이로운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존재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예전에 '분홍빛 여인'이 우리 아버지에게 칭찬을 건넸을 때 아버지가 그 칭찬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부모님이 내가 얼마나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을 받았는지 이해하고, 스완이 나에게, 혹은 그들에게 그것을 베풀었을 때 그것의 가치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했던 그 너그럽고 예의 바른 스완에게 감사를 표해주었으면 했다. 마치 루이니의 벽화 속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동방박사가 코는 굽어 있고 머리는 금발인 채로, 예전에 그와 무척 닮았다고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불행히도 스완이 내게 베푼 이 호의는―귀가하자마자 외투를 벗기도 전에 내 마음만큼이나 감동적인 감정을 그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켜 스완 일가에게 거대하고 결정적인 어떤 '친절'을 베풀도록 그들을 움직이게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부모님께 알렸던 것인데―부모님께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듯했다. "스완이 너를 베르고트에게 소개했다고? 아주 훌륭한 친분이고 매력적인 관계구나!" 아버지가 비꼬듯 외쳤다. "이젠 별일이 다 있군!" 아아, 내가 그가 노르푸아 씨를 전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이자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그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가 삐뚤어지고 악의적인 정신을 가졌다는 걸 잘 증명해 주는군. 내 가엾은 아들아, 원래도 상식이 별로 없었지만, 너를 완전히 망쳐놓을 그런 환경에 빠져드는 걸 보니 안타깝구나."
이미 스완가(家)를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다. 베르고트에게 소개된 일은 그분들에게는 첫 번째 잘못, 즉 할아버지가 '신중함의 결여'라고 불렀을 법한 그분들의 약점에서 비롯된 해롭지만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였다. 나는 노르푸아 씨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이 사악한 인간이 나를 매우 지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그분들의 불쾌함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부모님은, 예를 들어 내 친구 중 한 명 같은 특정 인물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하실 때――지금의 나처럼――만약 그 인물이 아버지가 존경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면, 그분은 그러한 지지 속에서 자신의 불길한 진단이 확인되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 잘못은 그분들에게 더욱 커 보일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곧 외칠 소리가 이미 들리는 듯했다. "당연하지, 모든 것이 한 통속이야!" 그 말은 나의 이토록 평온한 삶에 곧 도입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듯한 개혁의 모호함과 방대함 때문에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베르고트가 나에 대해 한 말을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부모님이 느끼신 인상을 지울 길은 없었기에, 그것이 조금 더 나빠진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게다가 그분들은 나에게 너무나 부당하고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계셨기에, 나는 그들을 더 공정한 시각으로 되돌릴 희망은커녕 거의 그러한 욕구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지적인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정직한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며 그 칭찬이 내게는 탐스러워 보일지언정 나를 악으로 부추기는 그런 사람에게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면 얼마나 기겁하실까를 생각하며,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약간 부끄러운 기색으로 이야기를 마치며 결정타를 날렸다. "그는 스완 부부에게 저를 매우 지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들판에서 독을 먹은 개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흡수했던 독의 바로 그 해독제가 되는 풀을 뜯어 먹는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님의 베르고트에 대한 편견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굴복시킬 수 있는 말을 내뱉은 셈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추론이나 그에게 바칠 수 있는 온갖 찬사로도 허사가 되었을 그 편견을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상황은 돌변했다.
"아…… 그가 너를 똑똑하다고 하더냐?" 어머니가 말했다. "그건 기분 좋은 소식이구나. 그분은 재능 있는 분이니까."
"뭐라고! 그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문학적 가치가 있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니까. 다만 노르푸아 씨가 에둘러 말했던, 그의 명예롭지 못한 사생활이 거슬릴 뿐이지." 아버지는 자신이 덧붙인 이 말이 내가 방금 내뱉은 마법의 단어가 가진 절대적인 미덕 앞에서 베르고트의 방탕한 사생활이 그의 판단력 부족과 더불어 더 이상 버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였다.
"오! 여보, 사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요." 어머니가 말을 가로챘다. "세상엔 이런저런 말이 많잖아요. 게다가 노르푸아 씨는 무척 친절한 분이지만,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항상 호의적이지는 않으니까요."
"그건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아버지가 대답했다.
"어쨌든 베르고트가 우리 아이를 기특하다고 했으니 그 정도면 많이 용서해 줄 수 있겠죠."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몽상에 잠긴 긴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사실 어머니는 베르고트의 이런 평가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질베르트를 간식 시간에 초대해도 좋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첫째는 질베르트의 집에서는 항상 차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차와 곁들여 초콜릿을 꼭 준비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나는 질베르트가 그것을 저급하게 여겨 우리를 몹시 경멸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끝내 해결하지 못한 의전상의 어려움이었다. 내가 스완 부인 댁에 도착하면 그녀는 내게 물었다.
"어머니는 평안하시니?"
나는 질베르트가 왔을 때 어머니도 똑같이 해주실지 알아보려고 몇 번 넌지시 여쭤보았는데, 이 문제는 루이 14세 궁정의 '각하'라는 호칭보다도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들으려 하지 않으셨다.
"아니, 난 스완 부인을 모르잖니."